<세계 나노기술 현장을 찾아서>(14)IBM 취리히 연구소(ZRL)

  IT산업에서 IBM은 마치 공기와 같은 존재다. 어딜가도 IBM의 기술적 영향력에서 벗어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빌 게이츠)

 아침 일찍 취리히 외곽에 위치한 IBM연구소(ZRL:Zurich Research Laboratory)를 찾아갔다.

 ZRL은 IT업계의 원조격인 IBM이 뉴욕 와트슨연구소에 이어 지난 56년 두번째로 설립한 곳으로 유럽을 대표하는 연구소다. 이곳에선 자기기록의 신호처리기술과 LAN(local area network) 핵심 프로토콜을 비롯해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온갖 정보통신기술을 구상하고 만들어왔다.

 특히 ZRL은 지난 80년대 원자를 하나씩 직접 조작하는 STM 및 AFM 기술을 실용화시켜 세계 나노연구사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마련했다. 당시 ZRL의 연구팀은 원자를 쌓아서 IBM이란 나노단위의 문자를 만들어냈다. 나노세계가 기업체의 홍보도구로 활용되는 최초의 순간이었다. ZRL은 이러한 나노기술과 고온 초전도기술분야의 연구성과를 바탕으로 86,87년 노벨상 수상자를 두 번이나 배출했다. 그런데 택시운전사 중에서 유명한 IBM 취리히연구소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이 나라에선 노벨상을 조국과 민족의 영광으로 기리는 단계는 지난 것일까.

 ZRL에 방문하니 이곳 나노연구를 총괄하는 폴 사이들러 박사가 취재진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는 연구소와 세계 나노기술 전반에 대해 상세히 설명하기 시작했

다.

 ZRL은 총 4개 연구부서가 있는데 폴 사이들러 박사가 담당하는 사이언스 앤 테크놀로지 파트가 나노연구를 총괄하고 있다.

 그는 우선 원자력현미경(AFM)에 근거한 새로운 데이터 저장기술인 밀러페드(Millipede)를 취재진에게 보여줬다.

 본래 밀러페드는 수백개의 다리를 가진 지네류 곤충을 뜻하는 단어인데 이 곳에서 개발 중인 나노기반 데이터 저장장치가 비슷한 외양을 지녀 징그러운 이름을 붙였단다.

 밀러페드는 1000여개의 AFM 어레이팁이 아래위로 움직여 폴리머필름(기록매체) 위에 홈을 내는 방식으로 정보를 저장한다. 기존 하드디스크가 전기적인 기록방식을 취하는데 비해 밀러페드는 나노단위의 구멍을 찍는 것만으로 정보저장이 수행된다. 정보를 재생할 때도 1000개의 미세한 AFM팁이 파진 구멍을 인식하기 때문에 기존 하드디스크보다 훨씬 빠른 재생속도를 구현한다.

 마치 맹인들을 위한 점자타자기와 유사한 구조다.

 그는 밀러페드는 열기계적인 방식을 이용해 폴리머필름 위의 정보입력과 재생·소거까지 가능하며 기존 HDD 자기기록기술보다 5배나 높은 기록밀도를 달성할 수 있다고 자랑한다.

 밀러페드가 주목을 끄는 이유는 전력을 거의 소모하지 않는 데다 빠른 정보 입출력 특성과 마모·충격에 강하기 때문으로 휴대형 정보통신기기에 매우 적합한 특성을 지닌다.

 사이들러 박사는 약 3년 뒤에는 밀러페드를 실제로 상용화할지 결정할 방침인데 첨단 AFM 기술이 일반인이 사용하는 휴대기기에 응용할 수준이 됐다는데 의미가 크다고 설명한다.

 사이언스 앤 테크놀로지 파트에선 유기 LED를 사용해 고분해능을 가진 디스플레이도 개발 중이다. 이곳에서 개발하는 디스플레이는 소비전력이 작고 낮은 전압에서 작동되며 구부러진 형상구현까지 매우 자유로운 장점을 지니는데 얼핏 시험소재를 보니 특성이 매우 우수했다.

 또 소프트 리소그래피 기술로 알려진 마이크로 콘택트 나노가공기법이 시연됐는데 이 방법을 사용하면 50㎚의 분해능을 지닌 구조체를 손쉽게 대량양산할 수 있다는 설명이다.

 뒤이어 ZRL의 자랑인 STM연구실을 방문했다.

 나노기술시대를 여는데 결정적 기여를 한 STM을 처음 발명한 연구실에 들어선 것이다.

 허름한 복장의 게하르트 마이어 박사가 취재진을 맞이하고는 STM과 AFM 기술을 이용한 나노구조체를 제작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이곳 실험실의 연구목표는 트랜지스터와 같이 상업적 응용 기능을 가진 새로운 나노디바이스를 제작하는 것인데 어떤 제품을 개발하고 있는지 절대 말해줄 순 없단다. 마이어 박사는 PC 화면을 통해 원자 및 분자를 조작, 나노구조물을 만들고 여기서 전자들이 어떤 거동을 하는지를 관찰하는 연구를 보여줬다.

 STM연구실에선 최근 학계에 많이 알려진 콴툼이미지 효과를 실제로 볼 수 있었다. 부도체 위에 일산화탄소 분자로 원모양을 만들고 원의 중심에서 약간 벗어난 곳에 자성체인 코발트 원자를 놓아두면 대칭인 곳에 코발트 원자를 놓은 것 같은 이미지가 나타나는 현상이다.

 이러한 연구를 위해선 매우 높은 진공상태가 필요한데 마이어 박사는 STM이 전자 하나하나를 조작하는 가공기구에서 벗어나 기초 물리학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치는 실험도구가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마지막으로 나노기술을 이용해 인공코를 만드는 바이오센서 연구실로 방문했다.

 이곳에선 특히 냄새를 감지하는 나노기반 후각센서 개발에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대체적인 원리는 여러 개의 미세한 실리콘 외팔보에 각기 다른 항체를 입힌 다음 대기 중의 특정냄새분자와 항체가 결합해서 외팔보가 휘어지는 정도를 측정하는 방식이다. 머지않아 공항에서 마약을 단속하는 경찰견과 유사한 냄새분석능력을 지닌 후각센서가 실용화될 것이라는 게 담당자의 설명이다.

 ZRL에서 개발한 AFM과 STM 기술은 전세계 나노연구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으며 현재 이들의 나노연구 수준은 원자를 자유롭게 끼워맞춰 제품상용화에 근접하는 단계에 도달하고 있었다.

 ZRL에서 근무하는 300여 연구원들의 국적은 무려 30개. 그야말로 취리히 인근의 조그만 마을에 세계의 과학자들이 모여서 첨단기술을 연구하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사람들은 이처럼 많은 나라의 과학자들을 수용하는 문화적 다양성이야말로 그들이 강대국 사이에서 살아가는 방법이란 점을 일찍이 체득한 것 같았다.

<배일한기자 bailh@etnews.co.kr>

사진; IBM연구소는 89년 제논 원자를 쌓아서 `IBM`이라는 나노 단위의 문자를 만들어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