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는 픽션이지만 생생한 리얼리티로 종종 현실이라는 환상을 심어준다. 그리고 그런 만큼 영화는 공허한 허구적 매체의 자리에서 걸어나와 현실에 개입하고 변화를 초래하는 기능을 떠맡기도 한다.
70대의 고령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힘이 넘치는 후카사쿠 긴지 감독의 영화 ‘배틀로열(Battle Royal)’은 가까운 미래의 일본을 배경으로 한다.
실업자 1000만, 등교(수업)거부 80만, 교내폭력으로 인한 교직원 사망 1200명이라는 자막이 말해주듯 신세기(21세기) 일본은 경제침체와 폭력으로 인한 사회적 붕괴에 직면해 있다. 정부는 일본의 위기를 돌파하기 위해 강인하게 아이들을 단련시키고자 배틀로열법을 시행한다. 배틀로열법은 중학생 1개 반을 선택, 무인도에서 1명이 살아남을 때까지 서로 죽이는 서바이벌게임이다. 영화에서 이 게임은 가상게임이 아니라 실제 상황이고 아이들은 살아남기 위해 잔혹한 게임에 몸을 맡긴다.
영화는 다수의 공포스런 죽음과 역겨운 살상으로 채워진다. 목이 잘리고, 총탄세례에 벌집이 되거나 수류탄에 신체가 찢겨 나가고 피범벅이 된 아이들의 몸은 더이상 인간의 것이 아니다. 이 지옥도 앞에서 눈을 감지 않으려면 대단한 인내가 필요할 정도다. 지독한 폭력의 사이 사이 열댓 살의 아이들이 사랑과 우정, 외로움과 가슴앓이에 대해 그 나름대로 펼쳐내는 순정은 차라리 비감하다.
후카사쿠 긴지 감독은 이 영화를 그가 겪은 전쟁의 이미지를 풀어내기 위한 동화로서 만들었다고 했다. 명분과 생존 또는 국가적 이기심에 의해 수많은 사람이 잔혹하게, 그야말로 비인간적으로 살상되는 전쟁이란 얼마나 거대한 폭력인가. 전쟁의 폭력적 이미지를 10대 아이들의 삶에 덧씌우면서 그들 또는 관객은 끔찍한 공포와 혼돈을 체험해야 한다. 그래서 목이 떨어져 나가고 탄환이 몸에 무수히 박히는 목불인견의 장면들보다 살인귀가 돼서라도 살아남을 수밖에 없는 현실이, 그렇게 아이들을 몰아가는 가공할 시스템이 더욱 끔찍한 것이다.
‘배틀로열’은 영화가 배경에 두고 있는 일본의 현실과 그들이 두려워하는 악몽의 도래를 현현한다. 경제에 거품이 빠지면서 장기불황에 허덕이는 일본 경제의 추락과 교육·윤리·가치관의 붕괴, 그리고 이것이 사회의 붕괴로 이어지는 일본의 어두운 그늘이 영화 속에 짙게 투영돼 이 ‘전쟁동화’에 현실감을 부여한다. 이것은 이 영화가 잔혹하고 폭력적이어서 사회에 악영향을 줄 수 있다는 혐의보다 앞서 이 영화의 존재 의미를 역설한다.
<영화평론가, 수원대 교수 chohyej@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