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52)강화도(Ⅴ)

  1866년 신미양요 때 프랑스군의 길 안내자로 강화도에 들어온 프랑스 신부가 있었다. 주베르 신부였다. 그가 쓴 ‘1866년 프랑스의 강화도 원정기’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있다.

 “조선의 작은 섬 강화도에서 감탄하면서 볼 수밖에 없고, 우리(프랑스)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는 한가지는 아무리 가난한 집에라도 언제든지 책이 있다는 것이다. 글을 해독할 수 없는 사람은 아주 드물고, 그런 사람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멸시를 당할 만큼 대부분이 글을 잘 알고 있었다. 프랑스에서도 문맹자에 대한 여론이 그만큼 엄격하다면 무시당할 사람들이 천지일 것이다.”

 당시 프랑스군과 조선군과의 전투는 문명과 문명의 충돌이었다. 비록 돌팔매질과 다를 바 없는 대포와 100보밖에 나가지 않는 총으로 섬을 지키고, 가난하기 이를 데 없는 작은 섬 강화도였지만, 주베르 신부는 집집마다 쌓여있는 책을 보고 충격을 받아 조선의 문명에 경외감을 표시했다. 당시 그들이 훔쳐간 외규장각 도서를 아직도 돌려주지 않고 있는 것도 그 도서의 가치를 지금까지 인정하고 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강화도. 결코 프랑스 군대는 당시 조선을 만만하게 보지 못했다. 삼랑성 전투에서도 조선의 매운 맛을 보았고, 비단으로 싸인 외규장각 책을 보면서도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쉬운 것은 철수하는 프랑스군에 의해 나머지 도서와 자료가 불타버렸다는 사실이다.

 강화읍 서쪽으로 위치한 하점면에는 큰 고인돌 하나가 자리하고 있다. 사적 137호로 지정된, 남한에서 가장 큰 것으로 인정받고 있는 고인돌이다. 세계적으로 가장 밀집된 분포도를 보이고 있는 우리나라의 고인돌은 강화도뿐만이 아니라 고창지역에도 밀집해 있는데, 북한지역에서 발견된 고인돌에는 5000년 전의 하늘 별자리가 새겨져있어 화제가 되기도 했다.

 만일 병인양요 당시 프랑스군들이 강화도의 그 고인돌을 보았다고 가정한다면 어떻게 생각했을까. 무게가 80톤이나 되는 돌을 5000년 전에 먼 곳에서 움직여 상판으로 올려놓았다는 사실을 알았다면 프랑스군과 주베르 신부는 또 한번 놀랐을 것이다. 고인돌은 그 자체가 힘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전 세계적으로 5만여개가 남아있는 고인돌은 우리나라에만 3만개 정도가 자리하고 있다. 청동기시대 족장의 무덤으로 알려진 고인돌에서는 발견되는 유물이 전혀 없거나 있어도 매우 미미하다. 때문에 시체의 안장을 위한 공간이 아니라 일종의 숭배사상을 위해 세워진 조형물이라고 볼 수 있다.

 거석(고인돌과 선돌을 통칭)을 이용하여 구조물을 남기게 된 것은 거석에 신비로운 힘이 깃들어 있다는 의식을 바탕에 두고 있다. 즉, 거석에는 정령이 있으며 이 같은 정령에 의하여 인간의 길흉화복이 좌우될 수도 있다는 생각때문이다. 고인돌은 선돌과 더불어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거석문화의 유산이며, 당시 한반도에 살았던 조상들의 정신세계를 느껴볼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되고 있다.

 고인돌의 형태는 양쪽에 지지석을 놓고 그 위에 상판 돌을 올려놓는 북방식 고인돌이 대표적이다. 남방식과 여러가지 형태의 고인돌이 있기는 하지만, 그 높이와 형태가 다를 뿐 상판으로 활용된 돌이 하늘을 향하고 있는 것은 같다. 고인돌의 상판은 요즘의 대형 화물트럭 열대가 있어야 움직일 수 있을 만큼 무거운 돌이 사용되었다. 당시 사회에서는 최소한 2500명 이상의 장정이 동원되어야 움직일 수 있는 돌이었던 만큼, 강력한 힘이 부근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말해주고 있다.

 그렇다면 왜 우리나라에, 특히 강화도에 이처럼 많은 고인돌이 분포되어 있을까.

 고인돌이 강화도에 밀집되어 있다는 것은 그 당시 강화도에 어떠한 형태로든 힘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는 흔적이다. 또한 그 힘을 통제하던 통치자도 있었을 것이고, 고인돌은 그 통치자와 연관지어 질 수밖에 없다. 만일 그 통치자의 무덤 위에 놓여졌다는 통설을 인정한다면 고인돌의 그 모양새가 예사롭지 않다. 잘 살펴보면 고인돌 상판이 놓여있는 형태가 위성 안테나처럼 보여지기 때문이다.

 조심스러운 생각이긴 하지만, 유난히 기(氣)에 예민하고 강한 우리민족이 하늘과 통신하고자 하는 의지를 죽어서도 하늘과 통신을 수행하라는 배려로 무덤 위에 고인돌을 만들어 안테나로 삼았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또한 매우 강력한 힘이 긴 세월 동안 존재한 결과로 강화도에 많은 고인돌이 남아있다고 할 때, 그 힘이 강화도에 존재한 이유를 우리나라에서 지기(地氣)가 가장 강력하다고 하는 마니산의 참성단과 연계하여 생각해 볼 수 있다.

 1999년 4월 8일자 ‘주간조선’에서는 전국 주요지점의 지기(地氣)를 측정한 결과를 발표했다. 엘로드(L-ROD)라는 측정기를 통해서 측정한 결과로, 종로부근이 17회전, 해인사 장경각 34회전이었던 반면 마니산 정상에서는 65회전의 결과가 나타났다. 전국 각지의 명당으로 꼽히는 곳들은 20∼30회전이었다. 이 결과로 마니산에 참성단을 쌓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드리게 된 것이 결코 우연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청동기시대, 단군시대에 이미 마니산의 기가 가장 강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제정일치의 당시 사회에서는 하늘과 통신할 수 있는 곳에 자리를 잡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을 것이다. 통제권의 확보와 동일한 사항이었을 것이고, 때문에 강화도는 강력한 힘이 존재할 수 있었을 것이며, 지정학적인 요인과는 별도로 기(氣) 확보를 위한 전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고도 예측할 수 있다.

 마니산은 해발 468m의 높이로, 세 봉우리가 나란히 서있어 먼 곳에서 보면 아름답고 웅장하게 보이는 민족의 영산이다. 마니산의 중간 봉우리 정상에 위치한 참성단에서는 남쪽으로 서해의 여러 섬이 보이고, 맑은 날에는 북쪽으로 개성의 송악산이 보인다. 경주의 첨성대처럼 기초는 하늘을 상징하여 둥글게 쌓고 단은 땅을 상징하여 네모로 쌓아 하원상방형을 이루고 있다. 생김새만으로도 기(氣)가 느껴지는 형상이다.

 기(氣)는 곧 에너지다. 현재의 정보통신이 전기적 에너지를 이용하여 통신을 수행하고 있지만, 전기의 특성을 이용할 수 없는 곳과의 통신은 기를 이용할 수밖에 없다. 기(氣)를 정보통신 매체로 체계화시키는 것이 정보통신 기술의 끝일 것이다.

 한반도 역사전개 과정에서 온갖 수난과 고통을 다 당한 강화도.

 문명과 문명간 충돌 접점에서 수많은 아픔을 당했지만, 아직도 꿋꿋하게 한강 어귀를 지키고 있는 강화도에서는 지금도 강력한 기(氣)가 분출되고 있다. 기(氣)는 에너지며 정보통신의 기본이다. 때문에 강화도의 그 기(氣)는 인터넷과 정보통신을 통해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새로운 문명체계를 세계에 전파하고, 그 문명을 통해 세상을 조율할 수 있는 기(氣)로 활용할 수가 있다. 우리가 만들어가고 있는 정보통신의 새로운 기준을 위한 기(氣)로 활용할 수 있는 것이다.

 강화도.

 알면 알수록, 보면 볼수록 흥미롭고 슬픈 섬 강화도는 필자에게 글쓰는 재미를 느끼게 해 주었다. 읽는 분들은 지루했을 지라도, 필자는 못쓴 것이 너무 많아 아쉬움을 느껴야 했던 섬이다. 자료확보에 도움을 주신 강화군청 문화재팀 이수진 팀장께 감사드리고, 몇 차례 방문중에도 차 한잔 나누지 못한 문우(文友)에게도 안부를 전한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