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경쟁력이다>(15)흔들리는 대학원(하)

내로라하는 명문 대학원을 졸업한 A씨는 졸업을 앞두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나름대로 열심히 공부했지만 ‘든든한 배경’이나 ‘끈끈한 연줄’이 없으면 대학 강단에 서기가 하늘의 별 따기임을 새삼 깨달았기 때문이다. 시간을 두고 유학이라도 가고 싶지만 유학 이후에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취업을 선택하자니 마땅히 갈 곳도 없을 뿐더러 대학원 졸업에 버금가는 대우를 해주는 곳도 찾기 힘들다. 자존심을 구기고 중소기업체 연구원으로라도 취직하고 싶지만 그동안 투자한 돈과 공들인 학업이 너무나 아까워 쉽게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다. 결국 교수에 뜻이 있어 최고 학부까지 도전한 A씨에게 대학원은 현실과 이상 사이의 높은 벽을 새삼 깨닫는 시행착오 과정이었다.

 대학원 졸업장이 휴지조각으로 변하고 있다. 대학원의 위상과 권위가 땅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연구중심 최고 학부라는 말은 이미 퇴색된 지 오래다. 석사와 박사학위를 받고도 마땅히 갈 곳이 없으며 ‘대학원생=고등 실업자’라는 주변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한다.

 물론 대학원이 이 지경까지 추락한 데는 대학 내부의 고질적인 병폐를 우선 지적할 수 있다. 교수 혹은 학교 당국의 넓은 아량(?)으로 한번도 강의를 듣지 않고도 석·박사 학위를 받는 예가 수두룩하다. 학위 논문 역시 남의 것을 도둑질하기가 일쑤다. 졸업시즌이면 빠지지 않고 나오는 뉴스의 하나가 바로 대학교 주변의 논문 복제가 성행한다는 것과 논문 질이 급속도로 떨어지고 있다는 내용이다. 대학원은 이미 실력이 아니라 ‘돈이 졸업장’이라는 인식이 광범위하게 확산돼 있다. 불사주의와 안일무사주의, 연고주의와 비밀주의, 비능률과 보수성이 우리나라 대학과 대학원의 오랜 병폐라는 사실은 익히 잘 알려져 있다.

 강단에 서기 위해서는 실력보다는 돈과 연줄이 먼저다. 교수 임용을 둘러싸고 보이지 않는 대학 선후배간의 밀고당기는 ‘돈독한 우정’은 이미 하나의 관행으로 정착돼 있을 정도다. 아무리 대학원에서 뛰어난 논문을 발표하고 우수한 연구성과를 올리더라도 이를 액면 그대로 반영해주는 대학원은 극히 일부다.

 그렇다고 대학원 내부에만 비판의 화살을 돌리기에는 왠지 석연치 않다. 대학원이 연구중심 대학으로, 전문화된 최고 학부로 올바로 서기 위해서는 주변환경 역시 병행해 개선돼야 한다.

 가장 먼저 지적할 수 있는 문제가 고급전문인력에 대한 처우다. 최근 사회적으로 이슈가 된 이공계 기피현상 역시 근본적인 원인은 열악한 대우와 고급기술인력의 지위가 실추되고 있다는 데서 찾을 수 있다.

 70년대 한강의 기적은 이공계 대학원을 졸업해 석·박사를 취득한 고급인력의 파격적인 대우 때문에 가능했다. 하지만 이젠 옛말이다. 40대의 평균소득을 볼 때 변호사와 의사 연봉이 1억원을 웃돌고 있으나 이공계는 어렵게 국립대 교수가 돼도 연봉이 3000만원 정도에 불과하다. 한국과학기술인연합회가 최근 실시한 이공계 대학원생 설문결과에 따르면 이공계 기피현상의 가장 큰 원인으로 ‘과학기술인의 처우와 불투명한 미래 문제’라고 87%의 응답자가 답했다. 이 조사에서 비이공계로 편입이나 고시를 생각해 본 학생의 비율은 무려 56%로 나타났다.

 대학원을 졸업한 고급전문인력의 사회적 지위도 열악하기는 마찬가지다. 이는 국가 경쟁력의 중추라 일컫는 과학기술분야 전문인력의 현실에서 찾을 수 있다.

 우리나라 지도층 인사 중에서 과학기술계 전문인력의 비중이 국회의원은 8%, 3급 이상 공무원의 16%, 상장회사 대표이사의 26% 수준으로 매우 낮다. 인기 높은 고시를 살펴보면 지난 해 기술·사법·행정·외무고시 등 선발인원 중 기술고시는 3.6%인 50명에 불과해 기술직으로 고위 공무원이 되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 통과하기 만큼 힘들다. 즉 공직과 민간기업에서 전문인력 출신이 거의 등용되지 못하는 현실이다. 과학기술부 자료에 따르면 IMF 외환위기 기간인 97∼98년 민간 기업의 연구인력이 14.6% 감소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최고 학부인 대학원은 ‘공부는 어렵고 대우도 나쁘며 불안한 직장생활을 하는 분야’로 비쳐지고 있는 셈이다.

 이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육 당국의 관심과 정책적 배려도 중요하다.

 교육부 차원에서 대학원 관련정책이라야 BK21이나 국책 국제대학원 육성 정도가 고작이다. 하지만 BK21은 이미 긍정적인 부분보다는 이를 악용한 파행적인 사례가 속속 나오고 있다. 세계화 시대를 겨냥해 국제지역 전문가를 육성하기 위한 거창한 목적에서 출발한 국책 국제대학원 역시 영어 이외는 찬밥 신세가 되고 있는 현실이다.

 교육 당국의 간섭과 대학의 눈치보기도 연구중심 대학원의 자생력과 경쟁력을 빼앗아가고 있다. 주변여건이 이렇다보니 대학원은 교육정책에서도 항상 뒷전이었고 대학 당국에서도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연구중심의 전문 최고 학부라는 대학원의 위상은 허울좋은 말뿐이다. 정보통신·생명공학·신소재·영상과 디자인산업 등 전략적 분야와 대학원 특성화 전략은 대답없는 메아리에 그치고 있다.

 가까운 미국을 보자.

 경영학은 스탠퍼드, 공학은 매사추세츠공대(MIT), 법학은 예일. 어느 나라보다도 전문성을 강조하는 미국은 대학원 역시 분야별로 특화돼 있음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미국의 국가 경쟁력이 바로 대학원의 연구 풍토에서 살아난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만큼 대학원의 교육과정은 ‘전문과 집중화’에 초점이 모아져 있다. 지금의 미국이 IT강대국으로 성장하기까지는 정부는 물론 대학 당국에서도 연구중심 대학원의 중요성을 일찍부터 감지해 대학 못지 않은 환경조성과 관심을 기울였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미국은 이에 그치지 않고 매년 교육전문가, 교수와 연구진, 학생 등을 중심으로 평가단을 구성하고 대학원 교육을 객관적으로 조사해 분야별로 가장 우수한 곳을 뽑아 발표하고 있다. 이를 통해 시간이 갈수록 느슨해지는 대학원 교육을 채찍질하고 있는 것이다.

 ‘지식이 곧 상품’이 되는 21세기의 지식산업시대에는 인력의 수준이 국가의 경쟁력을 결정짓는 잣대다. 노동력을 보유한 사람으로서가 아니라 지식과 기술이 체계화된 전문인적자원으로서의 중요성이 커지고 있다. 지금이라도 연구중심의 대학원을 만들기 위한 범국가적인 마스터플랜을 세워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은 것도 이 때문이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