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매각은 한국 반도체 인프라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것입니다.”
하이닉스의 협력업체 모임인 ‘하이닉스협의회’ 소속 79개 반도체 장비·재료업체 관계자들이 25일 하이닉스에서 긴급간담회를 갖고 내린 결론이다.
이는 다시말해 ‘헐값’이든 ‘제값’이든 상관없이 하이닉스를 마이크론에 파는 것 자체가 ‘반도체강국’ 한국의 반도체 인프라에 결정적인 악재로 작용할 것이란 얘기다.
반도체장비 및 재료업체들이 하이닉스 매각이 국내 반도체 인프라의 붕괴를 가져올 것이라며 극단적으로 우려하는 이유는 크게 몇가지로 압축된다.
우선 하이닉스의 매각으로 국내 메모리업체는 사실상 삼성전자만 남게 되며, 이는 자칫 ‘산업공동화’에 따르는 인프라 위축으로 귀결될 것이 자명하다는 것이다.
물론 마이크론이 하이닉스에서 인수할 6개 팹을 통해 생산능력을 배가시키고 결국 시장지배력을 높인다면 일견 국내 반도체산업이 활성화할 수도 있다. 이 부분에선 정부와 채권단, 금감위 등 관계기관도 동의하고 있다.
그러나 만약 마이크론의 하이닉스 인수목적이 생산능력과 생산기지 확충을 위한 것이라기보다는 경쟁업체를 인수함으로써 공급물량을 조절하고 시장지배력을 높이는 미국식 인수합병(M&A)방식의 일종이라면 얘기는 달라진다.
반도체업계 일각에선 이미 마이크론과 하이닉스의 매각협상 초기부터 마이크론측이 인수한 현 하이닉스 공장을 장기적으로 폐쇄할 수 있을 것으로 우려했다.
만에 하나라도 이렇게 될 경우 하이닉스에 반도체장비와 재료를 납품, 국내 반도체산업 중흥에 일익을 담당해온 수많은 국내 관련업체들은 ‘설땅’을 잃을지도 모른다.
또 하나 간과해선 안될 대목은 과거 LG반도체에 이은 하이닉스의 ‘중도하차’로 국내 반도체분야의 R&D가 크게 위축될 수밖에 없을 것이란 점. 경쟁 없이 발전도 없다는 얘기다.
이는 결국 고급 이공계 인력의 반도체 기피현상을 불러일으켜 21세기 지식정보화시대를 맞아 산업 인프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는 고급인력 수급문제를 야기할 것으로 보인다.
공급선이 삼성전자 하나로 압축되는 데 따른 반도체 장비·재료분야의 수급구조 악화도 몹시 우려되는 부분이다. 사실 그동안 중소업체인 장비·재료업체들은 삼성과 하이닉스라는 두 거목의 보이지 않는 견제와 경쟁속에서 균형을 찾으며 나름대로 입지를 굳혀왔다.
그러나 사실상 삼성 하나로 공급선이 축소된다면 종속적인 수급구조 등 독점화에 따른 각종 폐해로부터 반도체 장비·재료업체들이 결코 자유로울 수 없을 것으로 보인다. 더욱이 이들 업체는 대부분 ‘힘없는’ 중소·벤처기업이다.
업계 한 관계자는 “일부에서 하이닉스가 매각돼도 삼성의 세계 1위는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이에 따라 한국 반도체 인프라도 별 이상이 없을 것이라고 말하지만, 이는 나무만 보고 숲은 보지 못한 것”이라며 “우리나라가 메모리 세계 1위에 등극한 데는 튼실한 인프라가 한몫 했다는 점을 결코 과소평가해선 안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하이닉스 매각이 당장엔 산업 인프라에 악재로 작용할 수 있지만 장기적인 측면에서는 하이닉스의 청산보다는 낫다는 견해도 없지 않다.
이와 관련, 이덕훈 한빛은행장은 “매각이 아니라면 독자생존을 위해 엄청난 투자가 수반돼야 하는데 대안이 없는 실정”이라며 “산업논리로 인프라를 생각한다면 청산쪽보다는 마이크론 매각쪽이 바람직하다고 본다”고 말했다.
<이중배기자 jblee@etnews.co.kr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