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이사회가 지난 19일 마이크론과 맺은 조건부 매각 MOU를 만장일치로 부결함에 따라 하이닉스와 마이크론간 매각협상은 사실상 결렬됐다. 이에 따라 하이닉스는 새로운 독자생존의 기회를 맞게 됐다. 하지만 시종일관 매각을 주장하며 독자생존에 반기를 들었던 주 채권단의 반발이 예상돼 전망을 낙관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왜 반대했나=하이닉스 이사회가 조건부 MOU 동의안에 대해 의외로 만장일치로 부결처리한 것은 무엇보다 잔존법인에 대한 생존 대책이 미흡하다는 점 때문이다.
이사회보다 하루 앞선 29일 열린 채권단 전체회의에서 △하이닉스 메모리부문의 매각안 △마이크론과의 MOU 체결 및 잔존법인 구조조정 동의안 △CB전환 및 운영위 변경과 지원불참 은행의 CB전환 후 매각제한 해제안 등이 통과됐다.
하지만 정작 하이닉스 잔존법인의 사활이 걸린 세부지원사항에 대해선 결정된 바가 없다. 다만 외환은행이 채권단 설득을 위해 사전에 제시한 잔존법인의 부채탕감 규모가 전부다.
부채탕감 규모에 대해서도 하이닉스 이사회와 채권단은 상당한 이견차이를 보였다. 하이닉스 측이 채권단에 제시한 안은 구조조정촉진법 적용대상 부채 4조8000억원의 91%인 4조4400억원을 탕감, 사실상 ‘부채 제로’를 만들자는 입장이었던 반면 외환은행은 1조7820억원을 탕감, 부채규모를 3조120억원 정도로 맞추자는 것이어서 입장차가 너무 컸다.
결국 하이닉스 이사회는 잔존법인의 생존대책이 보장되지 않은 상황에서 MOU에 동의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MOU 동의안에 승인할 경우 이후 야기되는 상황이 결코 하이닉스에 이롭지 못하다는 판단도 매각반대의 이유로 작용했다. 우선 이사회 매각승인 결정과 동시에 노조가 총파업에 착수할 예정이어서 하이닉스는 회사 신인도 추락, 기존 거래선 이탈 등의 피해를 입게 되고 설령 이후에 노조가 현업에 복귀하더라도 메모리 산업 특성상 파업기간 외에도 공장 재가동에 필요한 최소 10일 이상의 추가 손실이 발생해 치명적인 상처를 입게 된다.
특히 마이크론이 본계약 체결에 앞서 하이닉스에 대한 정밀실사를 실시해 의도적으로 협상포기를 선언할 경우 모든 기밀유출에 따른 경쟁력 약화로 홀로서기가 불가능해질 수도 있다는 판단이다.
◇각계 반응=하이닉스 이사회의 MOU 동의안 부결에 대해 각계는 엇갈린 반응을 보이고 있다. 메리츠증권의 최석포 연구원은 “이사회의 만장일치 부결은 드라마틱한 결정이었다”며 “정부에서 반대의견을 수렴하는 등 다각도의 검토없이 무모하게 밀어붙인 것이 이사회의 반발을 샀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는 “향후 메모리 가격을 포함 반도체 시장이 그렇게 낙관적인 것은 아니어서 걱정되는 부분도 있으며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뼈를 깎는 내부 구조조정만이 수반돼야 한다”고 지적하고 “장비·재료 업체들이 최근 공개적으로 하이닉스 회생을 외친 것에 대해 책임있는 공조전략을 구축하는 것도 하나의 방안”이라고 설명했다.
KAIST 경종민 교수는 “다행스런 결과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많다”는 지적이다. 경 교수는 “산업인프라의 중요한 축인 반도체 산업을 잃을 뻔했다”고 말하고 “대우가 톰슨의 TV부문을 1프랑에 인수하려 할 때 프랑스 국민들이 반대했던 것을 기억하고 있으며 지금 톰슨은 기사회생해 프랑스 국민의 사랑받는 기업으로 다시 태어난 것처럼 하이닉스도 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또 경 교수는 “일단 부결된 이상 정부·금융·산업계 모두 독자생존을 위해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며 반도체 산업 인프라를 위해 학계가 할 수 있는 일에 적극 참여할 것”이라고 말했다.
총사퇴를 불사하며 매각에 반대해온 하이닉스 노조는 축제 분위기다. 정상영 노조위원장은 “그동안 노조는 임금동결을 받아들이는 등 회사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해왔다”며 “향후 노동자와 임직원이 회사 독자생존을 위해 할 수 있는 부분은 회사측과 적극적으로 논의하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그는 또 “하이닉스 전 근로자는 이미 추가 구조조정을 각오하고 있으며 회사생존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하이닉스의 매각으로 반도체 인프라 위축을 우려, 반대했던 반도체 장비업계 관계자들도 “이번 협상은 애초부터 무리하게 밀어붙이는 등 첫단추를 잘못뀄다”며 “20년동안 반도체 인프라에 대한 보존대책이 없이 하이닉스를 매각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항변했다.
◇전망=결과적으로 하이닉스는 다시 한치 앞을 예단하기 힘든 안개 형국에 처하게 됐다. 하이닉스는 일단 채권단측에 설명했던 바대로 독자생존에 적극 나설 태세다. 하지만 하이닉스의 독자생존 가능성은 D램 경기에 좌우되므로 낙관할 수만은 없다. 하이닉스의 확실한 독자생존을 위해서는 채권단의 신규자금지원과 부채탕감이 전제돼야 하지만 칼자루를 쥔 채권단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알 수 없다.
이에따라 하이닉스가 결국 채권단의 지원을 끌어내지 못한다면 독자생존이 불가능하다는 전제 아래 법정관리 등 청산절차를 밟지 않겠느냐는 관측이 정부와 채권단내에서 흘러나오고 있다. 하이닉스가 국내경제의 불안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어 하루라도 빨리 청산절차를 밟아야 한다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그럼에도 하이닉스가 법정관리로 간다면 소액주주와 종업원, 협력업체의 불안이 가중되는 데다 대외신인도가 급락, 국가경제에 큰 충격파를 가져다줄 것으로 보여 현실적으로 선택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분석도 있다. 현재로선 그 누구도 하이닉스의 운명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