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원 K씨(42). 그는 요즘 초등학생 아들과 거의 친구처럼 지낸다. 아들의 머리가 굵어지면서 다소 서먹했던 관계는 게임 덕분에 180도 바뀌었다. 아들과 온라인게임 ‘비앤비’ 대결을 벌일 수 있는 저녁시간이 기다려지기도 한다. 재미도 재미지만 아들과 게임을 즐기다보면 그동안 단절됐던 대화의 문이 활짝 열린다. 주위에 아들과 서먹한 관계를 호소하는 친구를 만나기라도 하면 주저없이 게임을 권하기도 한다.
게임이 가족 문화콘텐츠의 핵심으로 떠오르고 있다. 그동안 TV나 비디오 등이 독차지해 온 안방 놀이문화를 게임이 급속히 대체하고 있다.
요즘 학생이나 직장인들은 일과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면 컴퓨터게임으로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린다. 주부들은 자투리시간이 나면 온라인게임에 접속한다. 주말이나 휴일에 부자가 게임대결을 벌이는 것도 다반사다.
덕택에 게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도 날로 바뀌고 있다. 그동안 게임하면 ‘킬링타임(killing time)용’으로 즐기는 저급한 오락수단으로 여겨졌던 것도 사실. 하지만 게임이 단순한 놀이에만 머물지 않고 가족간 커뮤니케이션을 활성화시키는 매개체로 급부상하면서 더할나위없는 가족 문화콘텐츠로 각광받고 있다.
이처럼 게임이 가족 문화콘텐츠로 급부상한 1차적인 이유는 PC와 인터넷이 대중적으로 보급됐기 때문. 요즘 웬만한 가정은 TV나 비디오 플레이어와 함께 PC를 갖추고 있다. 인터넷 이용자도 2500만명을 넘어서면서 거의 모든 국민이 ‘정보의 바다’에 접속하고 있다.
하지만 유독 게임이 각광받는 것은 PC로 즐길 수 있는 콘텐츠 가운데 게임만큼 재미있는 콘텐츠가 없기 때문이다. 최근들어 게임은 그래픽 기술의 발달로 마치 애니메이션의 한장면을 연상할 만큼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더구나 게임은 유저의 조작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는 상호작용성(interactivity)을 구현하기 때문에 그 어느 엔터테인먼트 보다 몰입성이 큰 특징을 갖고 있다. TV로 대변되는 그동안의 안방 콘텐츠가 단순히 보는 것에만 만족해야 했던 것에 비하면 더욱 적극적이고 다이내믹한 재미를 선사하는 셈이다.
최근들어 인터넷 대전이 가능한 네트워크게임이나 온라인게임이 대거 등장하면서 이같은 게임의 속성은 더욱 확대재생산되는 실정이다.
게임컨설팅업체 게임브릿지의 유형오 사장은 “게임의 가장 큰 매력은 ‘사이버 스페이스 속에서 내가 움직인다’는 상호작용성에 있다”며 “최근 상호작용성 기능이 대폭 보강된 PC게임이 잇따라 등장하면서 PC게임이 새로운 놀이문화를 창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근 비디오콘솔게임이 본격적으로 보급된 것도 게임이 가족 문화콘텐츠로 급부상하는 데 일조하고 있다. 비디오콘솔게임의 경우 PC나 온라인게임과는 달리 TV를 통해 즐길 수 있다. 이 덕분에 게임이 이제는 TV가 놓인 거실까지 상륙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동안 게임이 어린이나 청소년의 전유물로 여겨진 이유 가운데는 공간상의 문제도 무시할 수 없다. 게임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이 게임장(오락실), PC방, 자녀의 방 등으로 한정됐기 때문이다.
따라서 거실이라는 열린 공간에 게임이 진출한 것은 게임이 명실상부한 가족 콘텐츠로 자리매김하는 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할 것으로 보인다. 이미 미국·일본·유럽 등 비디오콘솔게임이 일찍이 보급된 국가에서는 이같은 현상을 심심찮게 만날 수 있다.
게임이 보편적인 가족 문화콘텐츠로 떠오르면서 게임의 형식이나 내용도 변화하고 있다. 어린이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하던 그동안의 형식과 내용에서 탈피하고 있는 것.
어린이와 학부모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아동용 PC게임이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것이나 하드코어 장르 일색에서 탈피해 조작이 더욱 간편한 온라인게임이 쏟아지는 것은 좋은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최근에는 PC 하나로 2인 이상의 유저가 즐길 수 있는 PC게임이나 온라인게임도 잇따라 출시되고 있다.
아동용 게임 전문개발업체 키드앤키드닷컴의 김록윤 사장은 “요즘 게임 개발업체들은 게임을 개발하기에 앞서 남녀노소 제한없이 즐길 수 있는 내용과 소재인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한다”며 “게임이 온가족이 함께 즐길 수 있는 놀이수단으로 자리매김할수록 이같은 고민은 더욱 심화될 것”이라고 말했다.
게임업체들이 ‘가족 마케팅’ 기법을 도입하기 시작하는 것도 주목할 만하다.
예컨대 어린이 게임대회를 가족캠프 형식으로 치러 어린이뿐만 아니라 학부모가 함께 참여하는 공간으로 확대한다든지 가족이 함께 모이는 패스트푸드점과 연계한 공동 마케팅 등을 펼치는 것이 대표적이다. 올해 가정의달을 맞아 게임업체들이 다채로운 가족 이벤트를 마련하는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아직도 게임이 가족 문화콘텐츠로 자리잡기 위해서는 걸림돌이 적은 것은 아니다.
최근 사회문제로 부각된 게임중독이나 온라인게임의 사회적 역기능 등은 아직도 게임이 보편적인 가족 문화콘텐츠로 부상하는 데 발목을 잡고 있다. 전문가들은 게임에 대한 인식이 많이 바뀌고 있지만 이같은 문제들이 지속적으로 제기된다면 한계가 분명하다고 입을 모은다.
온라인게임업체 제이씨엔터테인먼트의 백일승 부사장은 “게임업체들의 입장에서는 게임의 역기능을 먼저 생각하기보다는 어떻게 하면 수익을 극대화할 것인가에 대해 더욱 많은 관심을 가지는 것이 사실”이라며 “게임이 가족문화 깊숙히 뿌리내리는 상황에서 게임이 미치는 부작용이 자신의 문제일 수도 있다는 것을 감안해 업체는 보다 건전한 게임의 개발이나 문화 확산에 많은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