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세기 아젠다 u코리아 비전>제1부 제3공간의 등장(4)물리공간과 전자공간의 충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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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해 9월,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두 대의 비행기가 충돌했다. 당시 이 사건은 기독교와 이슬람 국가간의 문명 충돌로 인식됐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전자공간(cyber space)을 지배하는 전자문명과 물리공간(physical space)에 기초한 유목문명간의 충돌로도 해석할 수 있다.

 이처럼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거대한 충돌은 이미 시작됐다. 공산주의라는 유령이 유럽에 떠돌고 있다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선언보다도 더 명료하게 전자공간의 유령은 이미 전 세계로 확산되고 온 대륙을 뒤덮고 있다.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의 전쟁처럼 물리공간과 전자공간의 충돌은 21세기 새로운 주도권 쟁탈전의 한 축을 형성한다. 영화 ‘매트릭스(Matrix)’의 주인공이 사이버 공간의 지배에 저항한 것도 물리공간과 전자공간간 충돌의 한 모습이다.

 네그로폰테 MIT 미디어연구소장은 “정보사회가 고도로 발달할수록 지리적 한계가 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지리적 한계가 없어짐에 따라 물리공간은 더 이상 문명의 특성을 결정짓는 요인으로 작용하지 못한다. 전자공간이 확대되면 될수록 물리공간의 위상은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다.

 인터넷과 같은 전자공간의 탄생은 거대한 정보공간의 등장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물리공간에 존재하던 각종 기능들을 전자공간이 대체하면서 물리공간과 전자공간 사이에는 팽팽한 긴장 관계가 형성됐다. 물리공간에 존재하던 상품과 소비자 그리고 막대한 부가 전자공간으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하지만 근본적으로 전자공간은 허구의 세계다. 전자공간의 허구는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지만 허구성의 이면에 존재하는 취약성으로 인해 전자공간은 언제나 불안정하다. 실체가 없는 허구이기 때문에 모방하기도 쉽다. 지적재산권이라는 제도적인 장치를 동원하더라도 여전히 전자공간의 아이디어는 쉽게 모방된다. 무의미한 정보들이 대량 생산되는 정보 스모그 현상이 발생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더욱이 전자공간상의 소비자들은 쉽게 변한다. 전자공간에서 벌어지는 유행은 수시간만에 바뀔 수 있다. 단골 사이버 쇼핑몰에 싫증난 소비자는 아무런 비용과 시간을 들이지 않고도 수천마일이나 떨어진 다른 사이버 쇼핑몰로 옮길 수 있다. 전자공간 상에서의 성공은 반짝 성공인 경우가 많다. 나아가 전자공간의 현실결핍성은 전자공간의 효율성을 한순간에 거품으로 만들어 버린다.

 전자공간에서는 무제한의 정보를 이용해 초스피드로 작업이 이뤄지지만 본질적으로 창조되거나 생산되고 제조되는 것은 없다. 사이버 공간은 사이비 공간으로 조롱받으며 ‘거품 공간(bubble space)’으로 폄하된다. 무엇보다 이들의 폐해와 불안정성은 아무런 장애와 마찰없이 주변으로 파급된다. 전자공간은 도미노 효과가 지배되는 공간이다. 단 하루만에 바이러스가 전 세계의 서버와 가정으로 전염되고 전자공간에서의 부도는 곧바로 전세계로 파급된다.

 그렇다고 해서 물리공간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다. 이미 인류는 전자공간의 단맛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리공간에는 거리적 제약이 존재한다. 물리공간에서의 여행은 그 자체로 막대한 노력과 비용이 필요하다. 전자공간에서는 단 1볼트의 에너지로도 구할 수 있는 정보를 물리공간에서 얻으려면 수만 볼트의 에너지를 써야만 한다.

 물리공간은 동시성의 제약에서도 자유롭지 못하다. 대화를 나누고 협상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일지라도 반드시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만나야 한다. 또 상품의 무게와 부피로 인해 저장과 유통에 많은 비용이 발생한다. 물리공간에서는 사람과 상품이 존재하는 것 자체가 비용을 발생시킨다. 물리공간은 태생적으로 비효율성을 안고 있는 것이다. 이같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은 각각의 고유한 장점과 매력을 가지고 있다. 특히 전자공간은 무제한성이라는 장점을 지녔다. 상상력만이 전자공간에서의 유일한 제약이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이 실현 가능한 곳이 바로 전자공간이다. 이에 반해 물리공간은 실체성이라는 안전한 토대를 제공한다. 실체성은 장애와 마찰을 의미하지만 여간해서는 변화하지 않는 안정성을 의미하기도 한다.

 전자공간과 달리 물리공간에는 마찰과 브레이크가 내장되어 있다. 그래서 물리공간은 안정적이지만 전자공간은 불안정하다. 전자공간은 창조와 혁신을 쉽게 받아들이지만 물리공간은 모든 변화에 저항한다. 전자공간이 가지지 못한 것을 물리공간이 보유하고 있고 물리공간에 결핍된 장점을 전자공간이 가지고 있는 것이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을 융합시킬 메리트가 바로 여기에 있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은 충돌과 융합을 반복하면서 진화할 수밖에 없다. 두 공간은 상이한 특성으로 인해 충돌할 수밖에 없으며 이 과정에서 두 공간의 고유한 장점을 동시에 추구하기 위한 융합이 끊임없이 시도된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충돌과 융합은 서로 모순관계가 아니다. 두 공간을 융합시키는데 필요한 에너지가 다름아닌 두 공간의 충돌에 의해 발생하기 때문이다.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충돌은 거대한 에너지를 분출한다. 아시아 대륙과 인도 대륙이 충돌해 대지진이 일어나고 거대한 화산 폭발로 티벳고원과 히말라야 산맥이 솟아났듯이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충돌은 새로운 제3공간의 탄생을 불러올 것이다.

 그래서 제3공간의 탄생은 요란할 수밖에 없다. 전자공간의 한쪽에서는 지진이 발생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대폭발이 일어나는 등 예상치 못한 충격이 발생할 것이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전자공간상의 기업들이 갑자기 붕괴되는 아픔도 각오해야 한다. 하지만 자유분방한 전자공간이 안정적인 물리공간과 연계될 때 비로소 경제적·정치적 활동을 수행하기에 안정적인 공간으로 그 모습을 확연히 드러낼 것이다.

 이제는 전자공간과 물리공간 간의 충돌을 넘어 짜임새 있는 융합을 논의할 때다. 21세기 국가발전은 어떻게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충돌과 단절을 극복하고 상호 불완전성을 해결하느냐가 관건이다. 따라서 우리는 전자공간과 물리공간의 충돌과 융합을 통해 만들어질 제3공간을 가장 효율적으로 설계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공동집필>

 하원규 ETRI 정보화기술연구소·IT정보센터장 wgha@etri.re.kr

 김동환 중앙대 공공정책학부 교수 sddhkim@cau.ac.kr

 최남희 청주과학대 행정전산학과 교수 drnhchoi@cjnc.ac.kr  

 

 ◆정보 매체의 진화와 공간 혁명

 정보 매체도 인류역사와 함께 진화해 왔다. 인류는 물리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해 끊임없이 정보 매체의 혁신을 모색해 온 것이다. 이같은 정보 매체의 혁신은 정보공간의 혁명으로 이어진다. 인류 역사에서 혁신적인 정보 매체가 등장할 때마다 인류의 정보공간도 물리공간의 제약으로부터 해방되는 변증법적인 발전과정을 걸어왔다.

 가장 고도화된 정보 매체인 언어는 가장 원시적인 매체이기도 하다. 인간의 물리적 발성기관에 의존하는 언어는 물리적인 제약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언어의 도달 거리에 있는 물리공간 안에서만 같은 정보를 공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정보공간은 시간이 흐름과 동시에 사라지고 단지 언어를 말하고 들었던 사람의 의식에서만 존재할 뿐이다. 언어에 기초한 원시적인 정보공간은 물리공간 속에 숨어 있듯이 원시적인 정보 매체에 토대를 둔 정보 공간은 전적으로 물리공간에 종속된 공간이다.

 인류가 문자를 개발하고 활용하기 시작함으로써 정보 공간은 최초로 객체화되기 시작했다. 문자가 존재하기 이전에는 많은 정보와 지식을 갖고 있는 사람이 죽으면 정보공간이 소멸했지만 문자의 등장으로 인해 정보를 영속적으로 표현하고 교환할 수 있게 됐다.

 문자에 이어 활자를 통한 인쇄기술의 발명은 인류 역사 발전에 획기적인 전환점을 가져왔다. 인쇄기술의 발명으로 정보를 대량으로 복제해 전파하고 공유할 수 있게 됐다. 또한 종이에 고밀도로 집적된 정보는 후세 교육을 위한 기반을 제공했으며 신문과 잡지라는 매체를 출현시켜 사회 구성원들의 의식에 일대 혁명을 불러왔다. 그러나 활자 매체 역시 물리공간 내에 존재했으며 물리공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었다. 근대적인 정보공간은 물리공간에 의해 갇혀 있었던 셈이다.

 컴퓨터와 인터넷을 통한 디지털 정보의 활용으로 인간은 드디어 정보 유통과 공유의 공간적인 제약과 시간적인 한계를 뛰어넘을 수 있게 된다. 물리공간상에서 이뤄지던 모든 정보활동은 컴퓨터와 인터넷 상에서 재현될 수 있었다.

 전자공간의 등장으로 인류 역사상 최초로 공간의 기능적 분리가 시작되고 더나아가 전자공간은 물리공간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물리공간으로부터의 해방을 선언한 전자공간과 기존의 정보 영토를 고수하려는 물리공간 간의 대충돌이 시작된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