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T의 완전민영화와 관련, 통신업계 내부에서 국제조달협정을 폐지해야 한다는 여론이 높아지는 가운데 정부가 다음달 열리는 한·유럽연합(EU) 각료회의 때 이의 개정을 포함한 폐지론을 적극 제기할 방침이어서 이의 관철여부에 업계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국제조달협정은 지난 90년 한·미 정부간 전기통신장비 관련 정부조달에 관한 쌍무협정을 맺고 정부와 정부투자기관의 통신장비 조달에 관한 기본원칙과 절차를 규정한 것으로 원래는 미국이 한국의 정부 및 정부투자기관의 장비입찰 때 자국의 기업이 배제되지 않고 ‘공정한’ 참여를 보장받도록 하자는 취지에서 마련됐다. 개발도상국의 경우 대규모 장비입찰 때 수의계약과 같은 관례 때문에 외국기업의 참여가 사실상 배제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KT의 경우는 현재 미국·캐나다·EU 등과 조달협정을 맺고 있다. 조달협정은 통신장비의 조달에 관한 기본원칙과 절차를 규정한 것으로 40일 동안의 공고기간과 국제입찰 기준에 따른 요건을 지키도록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KT가 협정의 원칙과 기준에 따라 1억원 이상의 장비를 구매할 경우 발주에서 구매까지 1년6개월 가량의 기간이 소요된다. 라이프사이클이 1년 미만인 기술발전 추세와 이에 따른 신장비가 속속 개발되는 현실을 감안하면 오히려 까다로운 구매절차가 경쟁력을 떨어뜨린다는 지적이다.
정부는 업계의 이같은 분위기와 조달협정 개정 혹은 폐지의 필요성을 감안해 우선 오는 6월 한·EU 각료회의 때 이를 적극 제기할 계획이다. 물론 지난달 9일 브뤼셀에서 열린 제4차 통신장비조달연례협의회에서 정부가 제기한 바 있기는 하지만 EU측이 이런저런 이유로 ‘성의’를 보이지 않아 우리정부의 뜻이 제대로 반영되지 않은 것은 사실이다.
정통부 관계자는 “한국의 통신시장이 성숙됐고 KT 역시 협정 당시와는 달리 민간기업화됐다는 점을 들어 조달협정에서 KT를 졸업시켜줄 것을 지난달 한·EU 통신장비조달연례협의회시 요청했지만 외면당했다”며 “이번에는 좀 더 적극적으로 나서서 통신시장의 자유화나 KT의 민영화 등 변화된 환경을 내세워 EU측의 자세변화를 이끌어내 앞으로 있을 한·미 조달협정 협상의 지렛대로 삼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실제로 업계에서는 국제조달협정이 주로 개발도상국가의 공기업이나 시장지배사업자가 자국의 장비를 불평등하게 집중 구매하는 것을 막기 위해 맺어졌지만 실제로는 EU나 미국측 기업의 진입공간을 넓혀주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예컨대 교환기의 경우 KT가 다양한 종류의 기기를 구매할 수 없었던 것은 국제조달협정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 협정으로 인해 구매자로서의 우월한 지위를 활용할 수 없었다는 얘기다. 결국 공기업인 KT에 대해 맺어진 협정이 완전민영화가 이뤄진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적용될 경우 국제조달협정의 선례로 남아 민간기업에도 확대·적용해달라는 압력이 들어올 것으로 업계는 우려하고 있다.
그러나 통신업계의 요구와는 달리 국제조달협정의 폐지는 쉽지 않을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우선 이와 관련, EU가 자국 기업들의 이익을 우선시해 조달협정에 선뜻 응하지 않을 것으로 예상되는데다 설혹 우리정부의 논리가 타당하다 하더라도 미국과의 협정이 존속되는 상황에서 EU가 이를 수용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결국 한·EU는 물론 한·미간 조달협정을 폐지하는 방향으로 정부가 강력하게 밀고 나가는 수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는 것이 업계 안팎의 시각이다.
이와 관련, 업계의 한 관계자는 “일본 NTT의 경우 일본에 진출한 미국계 기업의 요청에 의한 것이기도 하지만 미국과 불평등하게 맺은 조달협정을 끈질기게 물고 늘어져 10여년만에 폐지한 사례가 있다”며 “우리정부도 우선 EU와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어내고 이를 기반으로 미국과의 협의에도 대처하는 등 필요한 사안에 대해서는 지속적이고도 단호하게 나서는 협상력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박승정기자 sj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