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이닉스 이사회의 조건부 양해각서(MOU) 부결처리 결정으로 자존심이 상한 채권단은 ‘사업분할 후 매각’이라는 대안을 내놓았다.
사실상 해외매각이 무산된 상태에서 하이닉스를 여러 부문으로 쪼갠 뒤 처리하는 것이 채권회수를 위해 최선의 방법이라는 판단에서다. 아예 이번에는 하이닉스 이사회가 재차 거부할 경우 법정관리를 각오해야 한다는 배수진까지 쳤다.
채권단이 밝힌 사업분할은 경쟁력에 따라 굿컴퍼니(good company)와 배드컴퍼니(bad company) 등으로 나눠 합리적이고 강력한 구조조정을 실시하는 방식이다. 언뜻 보면 채권단이 굿과 배드로 대별되는 명확한 판단기준을 마련한 것처럼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다.
굿컴퍼니를 남겨두고 배드컴퍼니를 매각하는 것인지 아니면 굿컴퍼니를 매각하고 매각이 불가능한 배드컴퍼니를 청산하는 것인지 기초적인 기준조차도 마련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굿컴퍼니를 남기면 독자생존이 가능해지지만 굿컴퍼니를 매각한다면 그것은 곧 하이닉스의 공중분해를 의미하는 것이어서 향후 논란의 여지는 충분하다.
◇굿컴퍼니를 남긴다=굿컴퍼니를 남겨두고 배드컴퍼니를 매각한다면 하이닉스가 채권단측에 사전에 제시한 독자생존방안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이닉스 고위 관계자가 “채권단으로부터 정식으로 사업분할안을 받아봐야 알겠지만 채권단의 분할안이 회사측이 마련한 방안과 큰 차이를 보이지는 않을 것”이라는 희망 섞인 말을 던지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다.
과연 어떻게 굿컴퍼니와 배드컴퍼니를 구분할까가 여전히 관건이 되긴 하지만 만일 사업부문으로 나눈다면 메모리가 굿컴퍼니에, 비메모리가 배드컴퍼니에 속할 가능성이 높다.
하이닉스가 지난 1분기 해외법인 연결기준으로 1450억원의 영업이익과 360억원의 경상이익을 달성한 것은 메모리사업의 호전 덕분이다. 즉, 메모리사업이 아니라면 하이닉스는 분기당 1000억원대의 영업이익 실현은 불가능하다.
더욱이 하이닉스의 매출구조가 메모리부문에 90% 가량을 의존하고 있고 128Mb SD램의 가격이 현물시장에서 2달러 후반을 형성하는 상황에서도 하이닉스 메모리 매출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고정거래가격은 여전히 4달러대를 유지하고 있다.
굿컴퍼니를 메모리, 배드컴퍼니를 비메모리로 구분한다면 배드컴퍼니 사업부문의 매각도 쉬운 편이다.
비메모리를 살 만한 매수자는 충분히 있다. 하이닉스의 비메모리 공장인 구미공장의 원주인이기도 하면서 하이닉스로부터 LCD드라이버IC(LDI)를 공급받고 있는 LG전자가 1순위다. 아남반도체·동부전자·ASIC협회 등의 국내 회사를 비롯해 최근 국내 비메모리 투자를 신중히 검토하고 있는 미국의 자일링스 등도 하이닉스 비메모리부문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결론적으로 채권단이 굿컴퍼니를 살리겠다는 결정을 내린다면 비메모리 분사와 추가 구조조정을 통해 독자생존하겠다고 주장하는 하이닉스의 손을 들어주는 셈이다.
◇굿컴퍼니를 판다=또 다른 방안은 굿컴퍼니를 매각하는 것이다. 굿컴퍼니에 메모리가 속하든 아니면 비메모리가 속하든간에 이는 하이닉스의 공중분해를 의미한다.
굿과 배드의 구분기준을 사업부문이 아닌 지역별(이천, 청주, 구미, 미국의 유진)이나 미세공정별(0.13∼0.18미크론, 0.22미크론 이상)로 구분해도 굿컴퍼니를 매각하게 되면 매수자를 구하기 어려운 배드컴퍼니는 청산을 면하기 어렵다.
이 경우 하이닉스라는 이름을 단 회사는 하나도 남지 않게 돼 하이닉스는 과거 LG반도체와 함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게 된다.
굿컴퍼니를 판다는 것은 매수자를 구할 수 있을 만큼 경쟁력 있는 사업을 굿컴퍼니로 몰아 일괄 매각하거나 매수자의 부담을 덜기 위해 굿컴퍼니를 또 다시 여러개로 구분해 다수의 매수자에게 배분해 파는 것이다.
물론 굿컴퍼니를 제외한 매수자를 찾기 어려운 배드컴퍼니는 사업부문이 아닌 설비를 매각하는 방식의 청산수순을 밟게 된다.
지난 3일 채권단이 협의회를 열어 굿컴퍼니와 배드컴퍼니로 구분하는 구조조정 원칙을 확정했을 때 이연수 외환은행 부행장은 “아직 구분기준이 마련되지 않은 만큼 확대해석을 말아달라”는 단서를 달았다. 그러나 또 다른 은행의 고위관계자는 ‘사견’이라는 말과 함께 “굿컴퍼니·배드컴퍼니 모두 매각하고 하이닉스란 이름은 더 이상 남지 않는 것으로 안다”고 말해 ‘분할매각론’은 곧 ‘청산’이라는 추측은 낳게 한다.
◇향후 반발은 없나=굿컴퍼니를 남긴다면 이는 정부의 하이닉스 신속매각원칙에 위배된다.
전윤철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5일 “하이닉스 이사회가 MOU를 부결한 것은 불행하고 유감스러운 일”이라며 “시장에 불안을 주지 않고 하이닉스 문제가 조속히 처리되도록 정부가 독려하고 있다”고 말했다.
전 부총리의 이같은 언급은 그동안 협상과정에서 ‘채권단이 결정할 일’이라며 한발 떨어진 입장을 강조하던 정부의 기본 입장과는 차이는 보이는 것으로 이미 정부가 간여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채권단이 굿컴퍼니를 남겨둘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 반면 굿컴퍼니를 팔 가능성은 높아진다.
굿컴퍼니를 판다면 하이닉스의 반발을 피하기 어렵다. ‘이사회의 반발은 곧 법정관리’라고 채권단이 엄포를 놓고 있지만 반발하거나 반발하지 않거나 똑같은 결과가 예상되므로 이사회가 반발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
주채권은행은 제2금융권을 포함한 나머지 채권단을 설득해야 하는 문제도 발생한다. 하이닉스를 분할 매각할 경우 채권회수율이 종전의 메모리부문 일괄 매각 때보다 낮아진다면 제2금융권의 반발은 더욱 거세질 것이 분명하다.
결국 주채권단은 팔 수도 안팔 수도 없는 사면초가의 상황에서 정부와 하이닉스, 나머지 채권단의 반발을 최소화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려면 장고(長考)가 불가피할 전망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