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차범근 전 대표팀 감독의 노트북PC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경기때마다 노트북PC를 펼쳐들고 선수들의 슈팅 방법과 상대 선수들의 움직임을 기록하고 회의때마다 이를 바탕으로 전략과 전술을 짜기도 했다. 다만 아쉬웠던 것은 차 감독이 기록한 다양한 정보가 개인의 것이어서 이후 데이터베이스(DB)로 남아 보다 체계적으로 계승·발전되지 못했다는 데 있다. 이번 월드컵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거스 히딩크 감독은 직접 선발한 10여명의 훈련 및 지원팀을 갖고 있다. 일명 히딩크 사단. 각 선수의 체력정도와 컨디션에 따른 경기성과를 일일이 관리하는 네덜란드인 트레이너를 비롯, 매 경기를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컴퓨터 프로그램을 활용해 동선과 취약점 등을 파악하는 전담 분석가도 있다. 포지션별로 전담 분석가도 따로 두었다. 그야말로 스포츠도 과학 전쟁이다. 편집자
2002 한일 월드컵 D-21. 제주도에서 막바지 훈련중인 거스 히딩크 월드컵 대표팀 감독은 아침 일찍 서귀포 강창학 경기장으로 선수들을 불러 모은다.
“6월 4일 월드컵 첫 경기와 10일 두번째 경기에 컨디션을 최고로 맞춰보자”는 히딩크 감독. 16강 진출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폴란드와 미국 경기에 각각 맞춰 선수들에게 최고의 컨디션이 될 수 있도록 인위적으로 컨디션을 조절하라는 명령이다.
그렇다면 과학적으로 컨디션 조절이 얼마나 가능한 걸까.
현재 대표팀은 ‘2+2’ 또는‘3+2 훈련프로그램(2∼3일은 강도 높은 체력훈련을 한 후 이틀은 강도를 낮추는 방식)’을 일반적인 훈련과정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컨디션을 인위적으로 조절할 때에는 과보상(hyper-compensation)방법이라는 스포츠과학을 이용해왔다. 과보상은 평소보다 과도하게 훈련함으로써 피로를 누적시킨 뒤 회복기를 갖는 방식. 회복후 피로했던 만큼 에너지를 더 갖게 돼 운동능력을 높이는 컨디션 조절법이다.
이처럼 이번 월드컵에 참석하는 대표 선수들은 기초체력 관리에서부터 수비 및 공격 방법, 시뮬레이션 가상 경기 등 스포츠과학과 정보기술(IT)을 통해 분석 및 대응방안을 마련하는 과학적 접근 방법을 처음 경험하고 있다.
지난해 11월 대한축구협회가 경기도 파주 탄현면에 130여억원을 들여 개장한 국가대표팀 트레이닝센터(파주NFC)에는 ‘청룡’ ‘백호’ ‘화랑’ 등 7개의 잔디구장과 100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최신식 숙소, 물리치료 등이 가능한 메디컬센터, 체력관리실 등이 갖춰져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눈에 띄는 것은 각종 경기와 경쟁국 선수들의 동향을 시청각을 활용해 분석하는 대회의실(Conference Room). 감독과 선수들이 모여 기존에는 영상화면의 반복 재생 정도로 분석했지만 최근에는 컴퓨터와 프로젝트를 연결, 시뮬레이션을 통해 경기 분석과 선수 배치 등을 놓고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한다.
대한축구협회 남상우 사무국장은 “트레이닝센터가 늦게 오픈되면서 과학적인 분석장비를 더 많이 확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움”이라면서 “이번 월드컵을 계기로 예산을 확보해 과학적이고 체계적으로 선수를 양성하는 데 더욱 힘을 쏟을 계획”이라고 말했다.
이번 월드컵에서 화려하게 성인 신고식을 준비하고 있는 일본 대표팀 오노 신지 선수(22)는 과학적 훈련으로 양성된 대표적인 인물이다. 탄탄한 기본기와 유연한 볼 컨트롤은 중학교 시절부터 세계적인 스타플레이어가 되겠다며 일본 국립트레이닝센터에 들어가 차근차근 과학적인 성장과정을 거쳤다는 평가다.
이는 일본 문부과학성이 ‘스포츠 진흥 기본 계획’을 수립해 스포츠 의사 과학의 연구성과를 도입하고 ‘국제스포츠과학센터’를 마련한 데 힘입었다.
여기에서는 선수별 연습과정을 데이터베이스화하고 수치를 비교하는 것은 물론, 체력단련에서부터 경기시 활용도가 높은 근육 분석 및 관리 등 이루 말할 수 없이 세분화돼 있다.
지도자의 경험이나 감에 의존하던 부분을 과학적 데이터를 근거로 분석하고 선수들 역시 과학적인 근거에서 훈련에 전념한다는 게 장점이다.
국내에서는 2002 세계 쇼트트랙 선수권 대회에서 솔트레이크 동계올림픽의 한을 풀고 6관왕에 오른 김동성 선수가 스포츠과학의 성공사례로 꼽힌다.
김 선수는 체육과학연구원과 함께 500m 단거리의 새로운 스타트 기술을 개발하기 위해 수개월 동안 집중 분석훈력을 받았다. 대다수 국내 선수들이 500m 승부의 80∼90%를 차지하는 스타트에서 승부가 뒤져왔기 때문이다.
김 선수는 이번 선수에서 총성이 나자마자 오른발을 바로 내딛으며 스타트를 펼쳤다. 훈련한대로 스타트 자세를 잡으며 왼쪽 스케이트 날을 빙판 위에 꼿꼿이 세워 중심축을 만들었다. 결과는 우승. 스포츠과학의 승리였다.
국민체육진흥공단 체육과학연구원 김동성 처장은 “21세기 정보시대에서 스포츠는 한마디로 과학전쟁과학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며 “진정한 의미의 스포츠 강국이 되기 위해서는 선수 육성과 실전 등에 다양한 정보분석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훈련 프로그램이 뒷받침돼야 하고 이를 위해 정부나 관계기관이 이해도를 높이고 지원을 아끼지 않아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