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문화1=요즘 삼성그룹 전자 관계사 사장단 회의에서는 종이서류를 찾아보기 힘들다. 이건희 회장(오른쪽 두번째)을 비롯해 모든 임원들이 서류 뭉치 대신 노트북을 열어 놓고 회의를 진행하고 있다.
기업문화2=LG전자 정보통신사업총괄 구미사업장에서는 임직원들에게 ‘미션임파서블’이라는 이름으로 각종 지령이 내려진다. e메일로 지령을 받은 임직원들은 임무를 완수하고 결과를 보고해야 한다. 사진은 구미사업장의 이인구 부장(왼쪽 세번째)이 지령에 따라 앞치마 차림으로 직원들에게 음료수를 대접하는 모습.
기업문화3=메리츠증권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 황건호 사장(오른쪽 두번째)을 비롯한 임직원들이 모여 술잔을 기울이는 ‘비어 미팅’ 행사를 통해 친목을 도모한다.
기업문화4=LGCNS의 임직원들은 매달 열리는 월례조회에 직접 참석하지 않고도 각자의 PC를 통해 이를 지켜볼 수 있다.
요즘 국내 기업들이 수상하다. ‘부어라, 마셔라’로 일관되던 사내 회식이 오페라 공연장에서 열리고 팽팽한 긴장감이 넘쳐야 할 생산공장에서 장난스러운 ‘알까기’ 대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뿐만 아니다. 사내 강당에서 모두 모여 엄숙한 분위기 속에 진행되는 월례조회가 모두 PC 앞에 편하게 앉아서 인터넷을 통해 실시된다. 몇몇 직원들은 아예 출근하지 않고 자신의 집에서 조례회의를 지켜본다.
이것이 2002년 현재 국내 기업의 문화다. 과거 ‘수직’이란 말 한마디로 설명되던 경직된 조직문화는 퇴출되고 새로운 문화가 도래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흐름 뒤에는 ‘정보기술(IT)’이 있다. 모든 업무가 IT시스템의 테두리 안에서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뤄지면서 수직적 업무 체계는 사라지고 권위만을 앞세우던 조직문화도 힘을 잃어가고 있다. 편집자
지난달 25일 LG전자 청주공장. 배상호 노동조합 청주지부장과 류시관 DRM사업본부장의 맞대결을 시작으로 ‘알까기 최강전’이 시작됐다. 각 생산부서별 대결로 진행된 이날 대회에서 DMC제조그룹 SR반이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정상에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어찌보면 유치한 놀이에 지나지 않을 수 있지만 이날 청주공장에는 즐거움과 활력이 넘쳤다.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긴장감을 풀고 모두가 어울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메리츠증권에 근무하는 ‘증권맨’들은 매달 마지막 금요일이면 업무가 끝나기 무섭게 여의도 본점으로 향한다. 지난해 9월부터 열리고 있는 ‘비어 미팅(Beer Meeting)’에 참석하기 위해서다. 매일 계속되는 주가와의 전쟁으로 한시도 긴장감을 풀 수 없는 증권맨들도 이날만은 신입사원부터 사장에 이르기까지 모두 시원한 맥주 한잔으로 그동안의 스트레스를 씻어버린다. 이 회사는 지난달에는 서울까지 올라오기 힘든 지방 지점 직원들을 위해 대구에서 행사를 열어 지방 직원들과 서울 직원들간의 친목을 다지기도 했다.
2002년 기업문화의 가장 큰 특징은 경직성으로부터의 탈피다. 더이상 직장 상사와 부하직원으로 대별되는 딱딱한 위계질서 문화는 대접받지 못하고 모두가 동등한 위치에서 자신의 일에 책임을 지고 자발적으로 업무에 임하는 문화가 부상하고 있다. 이제 상사의 지시에 따라 일방적으로 움직이는 수동적인 업무문화로는 치열한 시장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없다. 구성원들의 개성을 살리고 자율성을 보장해주는 것이 현재 기업문화의 대세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기업문화의 중심에는 IT가 존재한다. 90년대 이후 불어닥친 인터넷을 동반한 ‘IT태풍’은 기존 산업구조뿐 아니라 기업문화 자체를 바꿔놓고 있다. 인터넷의 등장은 기업에 수직적이고 일방적인 커뮤니케이션이 아닌 수평적인 양방향 커뮤니케이션을 가능케 했다.
과거 80년대까지만 해도 신입사원의 의견이 사장에게 전해지기란 결코 쉽지 않았다. 팀회의·부서회의 등 수많은 단계별 회의를 거치면서 당사자의 의견은 변질되기 일쑤였고 아예 휴지통으로 사라져버리는 경우도 많았다. 하지만 모든 업무가 인터넷을 통해 진행되는 지금은 사정이 달라졌다. 온라인에서는 사장도, 부장도, 대리도 모두 동급이다. 사내 네트워크에 개설된 온라인 게시판에서는 신입사원도 사장을 상대도 불만을 표시할 수 있으며 회사 전략의 잘못된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처럼 각기 다양한 의견이 표출되면서 기업은 더 개방적이고 유연하게 변화하고 있다. 이제 일부 기업에서는 과거에는 상상할 수도 없었던 재택근무를 허용하기도 한다. 무조건 회사에 출근해 상사의 눈앞에 있어야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인정받던 과거와 달리 본인의 필요성에 따라 원하는 곳에서 근무할 수 있다.
지난 2000년 5월부터 재택근무를 하고 있는 LGCNS 경영지원팀 김영실 과장은 일주일에 2번 정도 부서회의가 있을 때만 회사로 출근한다. 김 과장은 업무를 보면서 가사도 틈틈이 할 수 있어 앞으로도 재택근무를 계속할 생각이다. 김 과장은 “재택근무를 하면 업무 생산성이 떨어질 것이라는 지적도 있지만 오직 업무성과를 통해 나의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열심히 일하게 된다”며 “재택근무로 인한 생산성 약화는 기우일 뿐”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기업문화가 바뀌어감에 따라 이러한 조직을 이끌어가는 CEO의 연령도 낮아지고 있는 추세다. 20,30대 CEO가 주류를 이루고 있는 벤처기업은 물론 LG전자와 삼성전자 등 대기업에서도 40대 임원들이 증가하고 있다. 특히 지난해 3월 한미은행에 이어 지난 3월에는 조흥은행에서 40대 행장이 탄생, 가장 보수적인 조직으로 평가받는 은행권에서도 40대 CEO시대가 열리고 있다. CEO의 연령이 낮아지는 것은 CEO들에게 단순한 경영기법에 대한 지식뿐 아니라 IT에 대한 전반적인 이해가 필수사항으로 요구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IT의 도입으로 인한 기업문화의 변화에도 어두운 구석은 있다. ‘동료애’로 뭉치던 조직문화가 개인화 성향으로 인해 모래알처럼 흩어지고 있고 종업원들에게 최대한 자율성이 부여되면서 그만큼 책임도 뒤따르고 있다.
사이버문화연구소의 민경배 소장은 “기업이 구성원들의 권한과 자율을 인정해주면서 이제 과정보다는 결과만을 중요시 하게 됐다”며 “기밀누출방지 명목으로 개인의 PC사용 상태를 모니터링하거나 특정 사이트에 대한 접속을 차단하는 등 보이지 않는 통제가 더 강화되고 있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스>사례---
콩으로 만든 건강음료 ‘베지밀’로 유명한 정식품(대표 김무영 http://www.vegemil.co.kr). 지난 73년 소아과 의사로 활동하던 정재원 회장이 유당 성분을 소화해내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어린이들을 위해 설립한 정식품은 이후 국내 두유시장을 선도하며 매출 1200억원대의 우량기업으로 성장했다. 그동안 정식품은 ‘인류건강에 이 한몸 이바지한다’는 창업이념처럼 기업 이익보다는 국민건강 증진에 힘써왔다. 실제로 이 회사는 각종 영양관련 학회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으며 지난해에는 북한에도 건강음료를 제공하는 등 활발한 사회활동을 벌이고 있다.
정식품은 이처럼 창업주의 의지에 따라 이윤 극대화를 위한 공격적인 경영보다는 안정적인 경영전략을 취하다 보니 기업문화가 다소 보수적이고 소극적인 면이 없지 않았다. 비록 지난 90년대부터 전문 경영인이 회사를 지휘하고 있지만 아직 엄격한 위계질서가 존재하고 이른바 ‘신세대 문화’는 찾기 힘든게 사실이었다.
이러한 정식품에도 최근 들어서는 변화의 조짐이 나타나고 있다. 머리에 염색을 하고 다니는 사원이 있는가 하면 각종 동호회 활동도 활발해지는 등 역동적인 분위기가 살아나고 있다. 최근 정식품에 부는 새로운 바람은 다름아닌 IT환경의 변화에서 비롯됐다. 안정을 중시하는 경영전략과 달리 정보화에 있어서만은 공격적인 자세를 취했던 정식품은 전사적자원관리(ERP)의 개념조차 생소하던 지난 98년 ERP 작업에 착수, 99년 11월 ERP시스템인 ‘K-시스템’ 구축을 완료했다. 2000년부터 이를 본격 가동한 이후 정식품에는 많은 변화가 일어났다. 서류접수 및 전화확인으로 이뤄지던 주문-접수-생산-배송 등의 절차가 모두 K-시스템을 통해 이뤄지면서 작업시간 및 물류비용이 크게 줄었다. 또한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부정의 여지를 없애 업무 투명화도 이룰 수 있었다.
이러한 업무방식의 변화는 자연스레 종업원들에게도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시스템을 통해 모든 일이 이뤄지다 보니 책임소재가 분명해져 평사원이라도 각자 해당 업무에서 만큼은 과장보다 더 큰 권한이 주어졌다. 이에 따라 과거의 경직된 문화는 서서히 사라지고 직원들의 개성을 살릴 수 있는 분위기가 조성돼 보다 활기찬 사업장으로 변모하기에 이르렀다.
물론 부작용이 없는 것은 아니다. 아직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부족해 전산 입력을 마치고도 다시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어 확인하는 현상이 이어졌고 책임소재가 확실해지다 보니 종업원들간의 인간적인 관계는 약해지고 개인화 성향이 강해지고 있다. 이처럼 부작용이 나타남에 따라 정식품은 기존 사내문화의 장점이었던 ‘정(精)’을 살리는데 힘쓰고 있다. 생산공장에서 열리는 ‘노사 한마음대회’를 강화하고 있으며 올해부터는 기혼 사원의 가정에서 아기가 태어나면 신생아용 음료 3개월분을 지원하고 있다.
이 회사 곽호병 관리이사는 “모든 변화에는 긍정적인 면과 부정적인 면이 혼재하기 마련”이라며 “정식품의 변화는 아직 진행 중이기 때문에 보다 긍정적인 방향으로 갈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