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플 인 더 뉴스>김정덕 과학재단 이사장

 “원하던 과학자의 길은 선택했지만 실험실을 끝까지 지키지 못한 것은 아쉬움으로 남습니다.”

 올해로 창립 25주년을 맞은 한국과학재단의 김정덕 이사장(61)은 과학자이지만 연구실을 지키기보다는 관리자로 많은 세월을 보내야 했다.

 김 이사장이 연구에 매달려 온 것은 지난 75년 30대 후반의 나이로 국방과학연구소에 들어가 한국형 유도탄을 개발하던 7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 기간을 제외하고는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의 전신인 한국전자기술연구소장직과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장 등 산·학·연·관의 요직을 두루 섭렵하며 현재의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자리에 오르기까지 주로 관리자의 입장에서 일해 왔다.

 이렇게 된 배경에는 당시 국내 과학기술계의 현실과 맞물려 있다. 20여년 전만 해도 우리나라에는 변변한 과학자 하나 없는 실정이었고 외국에서 학위를 받은 뒤 귀국하면 너도나도 신문에 그 사실이 보도될 만큼 귀한 존재였다.

 그는 당시 ‘무기력한’ 국내 과학기술계의 현실을 앞에 놓고 차마 실험실에 앉아 있을 수만은 없었으며 결국은 원하던 길로 들어서지 못했다고 회고한다.

 그렇게 그는 30년이 넘게 우리나라 과학기술의 부흥을 위해 한알의 밀알이 돼 한평생을 살아왔다.

 다소 풍성해 보이는 몸과 그리 빠르지 않은 말투, 새벽마다 조깅을 해서인지는 몰라도 건강해 보이는, 웃는듯 마는 듯한 미소가 자연스러워 보이는 김 이사장이다. 그러나 그는 보기보다 성격이 급한 편이다. 그렇다고 급한 사람들의 특징인 화를 쉽게 내지는 않는다. 30년의 세월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다.

 “재단을 운영하며 직원들에게 화를 내본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남들은 경영을 하면 결재판도 집어던진다고 하는데 아직까지는 그럴 일이 없었습니다. 인복이 있는 것 같습니다.”

 좀 지나친 표현일지는 몰라도 처음 대하면 ‘솜’같이 물렁해 보인다. 그렇기에 그 속에 ‘칼’이 들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다지 많지 않다. 외유내강형의 성격 때문이다.

 어린시절 그다지 유복하진 않았어도 3남3녀 중 둘째아들로 태어나 일제시대와 6·25를 거치며 초등학교 교장이었던 아버지를 따라 4번이나 전학을 해야했던 그는 대법관을 지낸 형이 공부를 워낙 잘해 항상 그의 뒤를 좇아다니며 바쁜 학창시절을 보냈다.

 그는 시골 살림에 서울 유학을 둘이나 보낼 수 없다는 집안의 결정으로 서울대 공대와 육군사관학교에 모두 합격했지만 육사를 선택하게 된다.

 육사에서 임관 후 군인의 길을 가기보다는 평소 갈망하던 이공계의 꿈을 펼치기 위해 졸업성적이 1∼4등까지에게만 주어지는 교수요원 모집에 응해 미국 조지아대학에서 전기공학 석·박사 학위를 받고 금의환향했다.

 “그 당시만 해도 박사학위자가 귀하던 시절이었습니다. 지금이야 해외에서 공부한 박사학위자가 넘쳐나 제대로 대접을 받지 못하지만요. 여하간 처음 국방과학연구소(ADD)에서 유도탄 개발 사업자로 연구원 생활을 시작하게 됐습니다. 원하던 일이었지요.”

 그러나 신은 그에게 순탄한 길을 걷도록 놔두지 않았다. 그의 나이 40이 채 안돼 유도탄 개발에 미쳐 있을 때의 일이다. 집안을 돌볼 겨를도 없고 연구실에서 살다시피 하던 그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전해졌다. 지금은 대수롭지 않지만 아내가 유방암이라는 선고를 받게 된 것. 결국 그는 하고 싶은 일을 얻은 대신 아내를 잃고 말았다.

 언제나 자신의 건강보다 남편의 건강을 챙겨줬고, 자신이 아프면서도 남편에게 힘과 용기를 줬던 아내였기에 남들에게는 속사정을 모두 풀어놓을 수 없었지만 지금도 가슴 한켠에 아픔을 묻고 산다. 암울했던 시대를 걸어온 우리나라 과학자들의 현주소요 자화상인 셈이다.

 박사학위를 받고 다시는 시험을 안보겠다고 다짐했다는 그는 어떤 말을 들어도 중도를 지키며 흔들리지 않는 나이라는 ‘이순’에 와서야 인생 자체가 ‘시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시험에 들게한 ‘아내의 일’도 그랬고 경영자의 입장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시시각각 판단을 달리해야 하는 일들이 모두 ‘시험’이더라는 것이 그의 인생철학이다.

 이러한 깨달음을 얻은 그는 과학재단을 맡아 직제를 바꾸고 연구행정시스템을 디지털로 구축하는 등 체질개선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또 과학재단의 운영도 사무총장 중심에서 이사장으로 중심으로 바꿔 기초과학 분야에 투자해온 과학재단의 위상을 강화시켰다.

 특히 정부가 추진해온 전자정부 구현정책의 기초를 제공하고 있는 ‘디지털연구행정시스템’은 연구관리 행정의 전과정을 인터넷과 인트라넷 기반으로 구축, 모든 시스템과 데이터를 연동하게 하는 첨단 웹환경의 일체형이 되도록 설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종이 없는 사무실 구현을 통해 업무효율성을 강화하고 과제 선정과 조달 업무의 투명성을 확보함으로써 그동안 있어왔던 불공정 시비나 잡음 자체를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습니다. 과학분야에 한 발 앞서 있는 미국이나 일본, 독일 등 선진 행정시스템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에서 우리의 행정시스템을 벤치마킹하겠다고 방문할 땐 정말 뿌듯합니다.”

 이제 그는 또다른 선택을 해야하는 ‘시험’ 앞에 직면해 있다.

 과학재단이 25주년을 맞아 기념행사를 가지며 약속했던 우리나라 기초과학의 중장기 발전 비전을 제시하고 향후 다시 시작하는 25년에 대비하는 재단의 역할과 위상을 정립하는 일이다.

 과학기술 환경이 불모지와 같았던 시절, 개척자 정신으로 일해왔던 그는 이제 기초과학 지원분야에서 우리나라가 세계 톱 5에 들어가도록 하는 데 남은 힘을 모두 쏟아부을 생각이다.

 “최근 사회문제가 되고 있는 이공계 기피현상도 사회적인 대우나 경제적인 보상 문제를 제기하기 이전에 수학이 좋고 실험실이 좋아서 선택하는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그런 일을 만들어 주는 일을 바로 정부나 과학재단이 해야 합니다.”

 그는 앞으로 남은 1년6개월의 임기동안 ‘대학시험’을 치르는 수험생의 마음으로 기초과학의 기틀을 다지는 일에 전념할 계획이다.

 

 <약력>

 △42년생 △57∼60년 광주일고 졸업 △60∼64년 육군사관학교(이학사) 졸업 △66∼71년 미국 조지아대 공학석·박사 △68∼75년 육사 전기공학과 조교수 △75∼82년 국방과학연구소 연구실장, 전자통신사업단장 △82∼85년 한국전자기술연구소장 △85∼86년 금성전기 기술연구소장 △87∼91년 한국전자통신연구소 부소장 △91∼95년 전자부품종합기술연구소장 △95∼97년 과학기술처 연구개발조정실장(1급) △98∼99년 하나로통신 부사장 △99년∼현재 한국과학재단 이사장.

 <대전=박희범기자 hbpark@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