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명으로는 안된다. 무더기로 등장시켜라.’
영화의 주연배우 개념이 크게 바뀌고 있다. 대체로 주연배우 하면 인기가 높은 1∼2명의 남녀배우가 나오는 것이 이제까지 한국영화 캐스팅의 대체적인 골격이었지만 최근 개봉됐거나 개봉을 앞두고 있는 영화 가운데 상당수가 무더기, 떼거리 주연을 표방하면서 기존 틀이 깨지고 있다.
지난 17일 개봉한 ‘4발가락’을 비롯해 10일 개봉된 ‘일단 뛰어’, 31일 개봉될 ‘묻지마 패밀리’, 6월 6일 개봉하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 등은 모두 3∼5명이 주연배우로 등장한다. 4월 개봉한 ‘울랄라 씨스터즈’ ‘재밌는 영화’도 4명의 주연배우를 골고루 기용하고 있다.
이는 여러 명이 나오더라도 1∼2명은 메인급 주연으로 두고 나머지를 조연급 주연으로 배치하는 기존 케이스와는 사뭇 다르다. 스토리 자체가 무더기 주연 골격으로 흘러갈 뿐만 아니라 누가 더 중요하다고 할 것 없이 3∼5명에게 엇비슷한 비중을 둔, 그야말로 멀티플한 주연 캐스팅이다.
◇3∼5명이 제일 좋아=요즘 인기 상종가를 달리는 주연배우 숫자는 3∼5명. 17일 개봉한 ‘4발가락’은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허준호·이창훈·박준규·이원종 등 4명이 주연을 맡은 갱스터 영화다. 특이한 것은 조연급으로 나오는 라이벌 역시 4인조 패거리를 이룬다는 것.
아우디(허준호)·르까프(이창훈)·각그랜저(박준규)·해태(이원종)는 광주 고등학교 시절부터 죽이 잘 맞는 4발가락 멤버. 서울 입성기회를 잡게 된 이들은 금도끼·은도끼에 얽힌 전설로 얽히고 설키면서 라이벌역 4인방인 곰탕·쑤시게·도대체·삑사리 등과 대립하는 것을 구도로 하고 있다.
4월 26일 개봉된 ‘울랄라 씨스터즈’도 이미숙·김원희·김민·김현수 등 여성 4명을 주연으로 기용한 케이스. 라이벌 관계에 있는 나이트클럽의 인수 위협에 맞서 클럽을 지키기 위해 기상천외한 댄스그룹으로 변신하는 4인방의 통쾌한 활약을 다뤘다. 국내 최초 패러디 영화인 ‘재밌는 영화’ 역시 임원희·김정은·김수로·서태화 등 4명을 주연으로 내세웠으며 지난해 선보인 ‘킬러들의 수다’ 역시 신현준·신하균·원빈·정재영 등 4명의 프로킬러를 중심으로 스토리를 구성했다.
지난 10일 개봉된 ‘일단 뛰어’는 송승헌·권상우·김영준 등 3명을 주연으로 내세워 젊은 팬층을 겨냥하고 있으며 내달 6일 개봉하는 ‘해적, 디스코왕 되다’는 임창정·양동근·이정진 등 색깔이 다른 3인을 전격 캐스팅해 80년대 한창 성황이던 동네 나이트클럽의 디스코왕 선발대회를 소재로 이야기를 코믹하게 풀어나간다.
이밖에 31일 개봉하는 ‘묻지마 패밀리’는 패밀리라는 용어답게 신하균·임원희·류승범·정재영·박선영 등 5명이 대거 주연으로 출연하며 내달 13일 개봉하는 ‘예스터데이’ 역시 최민수·김승우·김윤진·김선아·정소영 등이 주연으로 등장한다.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가 불러온 무더기 주연 열풍=올들어 무더기 주연 기용이 뚜렷해지고 있지만 이 같은 흐름에 불을 댕긴 것은 지난해 말 개봉된 ‘두사부일체’와 ‘달마야 놀자’.
깡패 두목이 학교에 가게 된 에피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되는 ‘두사부일체’는 두목인 정준호가 메인 주연이기는 하지만 그다지 주연의 위상이 부각되지는 않는다. 조폭이라는 특성상 오히려 정웅인, 정운택, 송선미, 박준규, 오승은 등 다른 주연의 역할이 더 부각된다.
‘달마야 놀자’는 무더기 주연의 결정판이라 할 만하다. 스님과 조직폭력배의 갈등을 기본 스토리 라인으로 하고 있어 주연이 무려 8명이나 된다. 박신양·박상면·강성진·김수로·홍경인·김인문·정진영·이원종 등을 각각 스님 4명과 깡패 4명으로 배치해 엇비슷한 비중을 두고 있다. 국내 최초 학원 무협영화를 표방한 ‘화산고’ 역시 권상우·공효진·허준호·김수로·장혁·신민아 등 6명을 주요 인물로 내세우는 캐스팅을 선택했다.
물론 이전에도 최진실·이미숙·김석훈·설경구·김윤진 등 최고 스타급 배우 5명이 나온 강제규 감독의 ‘단적비연수’(2000년 제작)가 있었지만 흥행에는 성공하지 못해 빛이 바랬다.
◇캐스팅난과 조폭영화 주류화의 산물=이처럼 무더기 주연이 늘고 있는 것은 이렇다 할 만한 영화배우 발굴이 어렵다는 현실에서 비롯된다. 흥행의 보증수표로 일컬어지던 한석규·심은하·고소영의 영화출연이 뜸한데다 흥행몰이 최정점에 섰던 배우들이 나오더라도 흥행과 직결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한 해 50∼60편이 만들어지는 한국영화 제작여건상 이 같은 캐스팅난을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가 멀티 주연구조로 흥행 위험을 분산시키는 것. 여러 명이 나오게 되면 각 배우들의 팬층을 영화관객으로 고르게 확보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1∼2명의 캐스팅이 실패하더라도 다른 주연배우가 이를 보완할 수 있어 전체 영화 흐름이 흐트러지지는 않는다는 계산이다. 또 이 과정에서 숨어있던 유망 배우의 진면목을 확인하는 등 수확도 적지 않아 후속 영화제작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단순히 캐스팅난뿐만 아니라 깡패·조폭·갱·양아치 등 한국영화 제작의 주소재가 패거리를 중심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또다른 요인으로 지적된다. 특히 ‘두사부일체’ ‘달마야 놀자’가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두면서 ‘패거리+코믹’이 흥행의 두 요소로 떠오르고 있어 이 같은 추세는 더욱 가속화할 것으로 예상된다.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