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58)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중)

 1854년. 뉴욕에 거주하고 있던 영국의 전신기술자 기스본은 영국에서 출발한 배가 처음 도착하는 미국의 뉴펀들랜드에서 뉴욕까지 좀더 빠른 시간에 소식을 전달받고자 전신용 통신케이블 설치사업을 시작했다.

 돈이 많지 않았던 기스본은 공사를 다 마치기 전에 돈이 떨어져 투자자들을 모집했다. 그 과정에서 우연히 한 젊은 남자를 알게 됐는데, 젊은 나이에 큰 재산을 모은 사람이었다. 그 젊은이는 전신기술자도 아니었다. 전문가도 아니었다. 그는 전기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몰랐고 통신 케이블이란 것은 한번도 본 적도 없었다.

 하지만 그 젊은이는 기스본의 제안을 듣고 아주 특별한 생각을 했다. 전문가인 기스본이 뉴욕과 뉴펀들랜드를 연결하는 한정된 목적만을 지향한 데 반해 그 젊은이는 불확실하지만 더 거대한 계획, 해저 케이블로 구대륙 영국과 신대륙 미국을 연결시키려는 계획이었다.

 젊은이는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 설치가 갖는 가치를 생각했다. 기술적인 가능성보다 그 기적을 통한 효과를 확신했다.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같은 맥박으로 움직인다는 생각만으로도 희열을 느낄 수 있었다.

 그 젊은이는 곧바로 전문가들과 연락을 취하고 영국과 미국 양쪽 정부에 탄원서를 낸 후 필요한 돈을 조달하기 위해 아일랜드와 뉴욕에서 캠페인을 벌였다. 전기와 전신의 가치에 대한 확신을 통한 사업성공 의지를 강력하게 주장했다. 5만3000파운드라는 거금의 자본금이 며칠만에 확보됐다. 당시 영국에서는 기술과 기계에 대한 낙관주의가 팽배해 있던 시기였다.

 모든 것이 처음이었다. 아직까지 비슷한 차원의 구상이나 계획이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었다. 적어도 3주 동안 계속 항해하면서 쇠와 구리와 구타페르카로 만들어진 거대한 케이블을 싣고 항해할 만한 배가 민간인에게는 한 척도 없는 상황에서 필요한 배는 두 척이었다. 그 젊은이는 영국정부로부터 가장 큰 전함 ‘아가멤논’호를 확보했다. 미국정부는 5000톤짜리 프리깃 함인 ‘나이애가라’호를 내주었다.

 배의 확보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었다. 지구상의 두 지역을 서로 연결시켜줄 끝없이 긴 케이블을 절반씩 싣기 위해서는 우선 배의 내부를 변경시켜야만 했다. 배에 실리는 케이블도 문제였다. 쇠밧줄처럼 단단해서 끊어지지 않아야 했고, 또 한편으로는 설치를 쉽게 하기 위해 탄력이 있어야 했다. 모든 압력을 견디면서도 비단실처럼 매끈하게 쭉 뻗어야 했다. 또 묵직해야 하지만 너무 통통해서는 안됐다. 즉 단단함과 정밀성을 동시에 갖춰 가장 미세한 전파라도 2000마일 이상을 전달해야 하는 것이었다. 이 거대한 줄의 단 한 군데에서라도 식별하기 어려운 작은 틈이 생기거나 조금만 울퉁불퉁해도 전파 전달은 차질을 빚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작업은 시작됐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공장들이 돌아갔다. 한 젊은이의 초인적 의지력이 모든 바퀴를 앞으로 굴렸다. 모든 광산의 쇠와 구리는 몽땅 한 줄의 끈을 위해 소비됐고, 엄청난 고무나무가 케이블 껍질로 사용되는 구타페르카를 만들기 위해 수액을 흘려야 했다.

 이 대담한 계획의 엄청난 규모를 보여주는 것은 26만7000마일짜리 전선이 단 한 줄의 케이블 안에 넣어진다는 사실이었다. 그런 전선 13개면 지구를 한 바퀴나 감을 수가 있고, 단 한 줄로 지구와 달을 연결할 만한 길이였다. 기술의 측면에서 볼 때 인류가 바벨탑을 건설한 이후로 이보다 더 장대한 일을 기도한 적은 없었다.

 1년 동안 기계들이 계속 돌아갔다. 전선은 흐르는 실처럼 공장에서 나와 두 척의 배 안으로 감겨들어갔다. 3주 동안 계속해서 깊은 대서양 바다 속으로 케이블을 늘어뜨릴 수 있도록 새로 고안된 브레이크와 후진장치가 달린 매우 무거운 기계도 배에 실렸다.

 전신기를 발명한 모스를 비롯한 최고의 기술자들도 참여, 함께 배에 탔다. 케이블을 가설하는 동안 자신들이 발명한 장비를 가지고 계속해서 전류의 흐름을 감독하기 위해서였다. 기자들과 삽화가도 떼거리로 몰려들었다. 콜럼버스와 마젤란 이후 가장 흥미로운 이 항해를 글과 그림으로 묘사하기 위해서였다.

 마침내 출발을 위한 모든 준비가 끝났다. 그때까지는 그 젊은이가 수행하는 사업에 대해 회의적으로 보는 사람이 더 많았지만, 이제 영국 전체가 적극적으로 관심을 기울였다. 1857년 8월 5일, 수백 척의 작은 배들이 아일랜드의 작은 항구 발렌샤에서 케이블 함대를 둘러싸고서 세계사적인 순간을 경험하려고 몰려들었다. 나이애가라호가 유럽대륙으로부터 바다 중간지점까지 케이블을 놓는 임무를 맡았다.

 하나의 케이블 끝이 나이애가라호에서 흘러나와 해안에 연결됐다. 그것은 곧 유럽대륙과의 연결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작별은 저절로 하나의 축제가 됐다. 해안가와 바다에서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손과 모자를 흔들었다. 날은 서서히 어두워지고 있었다. 인류의 가장 대담한 꿈 중 하나가 막 실현되려는 참이었다.

 나이애가라호는 그 거대한 몸집으로부터 거미처럼 끊임없이 뒤로 실을 떨어뜨리면서 대서양을 항진했다. 갑판에서는 케이블 내리는 기계가 규칙적으로 덜컹거렸다. 배에 탄 사람들은 몇 시간이 지나자 이 규칙적으로 방아찧는 것 같은 기계 소리에 완전히 익숙해져 자기 심장 뛰는 소리처럼 아예 무감각해져 버렸다.

 나이애가라는 끊임없이 케이블을 배 바닥 아래로 흘리면서 끊임없이 아일랜드와 모스 부호를 주고받았다. 이미 오래 전에 해안이 보이지 않게 되었는데도 수중케이블로 통하는 전신의 소리는 매우 또렷했다. 마치 유럽의 도시에서 다른 도시와 소식을 주고받는 것 같았다. 배는 이미 얕은 바다를 떠나 이제 아일랜드 뒤쪽으로 솟아 있는 깊은 바다 구역을 부분적으로 지나고 있었다.

 그 젊은이는 작업이 시작된 후로 줄곧 배 위에서 불안한 시간을 보냈다. 1857년 8월 11일 저녁, 여러 시간의 작업과 흥분으로 지친 몸을 좀 쉬려고 자리에 누웠다. 그 때 갑자기 털털거리는 소리가 멎었다.

 한 순간에 배에 있던 모든 사람이 깨어나 갑판으로 달려나왔다. 케이블의 출구가 비어 있었다. 끔찍한 일이었다. 케이블이 갑작스럽게 몽땅 물레에서 미끄러져 나가버린 것이었다. 풀려 있는 끝을 제때에 잡기란 불가능한 일이었고 잃어버린 끝을 물 속에서 찾아 다시 끌어올리기란 더욱 불가능한 일이었다.

 기술상의 사소한 잘못이 여러 해에 걸쳐 이룩한 일을 허사로 만들어버렸다. 결국 대담하게 출발했던 사람들이 실패자의 몰골을 하고서 영국으로 돌아왔다. 영국에서는 모든 신호와 부호가 갑자기 조용해져 버렸기 때문에 좋지 못한 소식을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세계 최초로 대서양 횡단 해저 전선 가설을 생각하고 시도한 그 젊은이는 이후 전신선 개통을 통해 영국과 미국을 열광의 도가니로 몰아넣고 단 하루 만에 최악의 좌절로 몰아넣을 바로 그 사람, 사이러스 필드였다.

 대서양 횡단 해저 케이블 설치작업의 첫번째 실패는 필드에게 아픔을 주었다. 하지만 그 아픔도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을 똑같은 박동으로 뛰게 하려는 필드의 의지를 꺾을 수 없었다. 실패는 아직도 여러 차례 남아있었지만 필드에게 그 목표는 충분한 가치가 있는 목표였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