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가을. 모든 직원들이 9시가 넘어서야 한 명 두 명 얼굴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늘 철야와 야근으로 부스스한 얼굴로 마주치던 직원들의 얼굴이었지만, 그 날 따라 모두 사뭇 상기된 얼굴로 사무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그리고는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이 ‘봤어?’ ‘어땠어?’라며, 저마다 집에서 시청한 가족들의 반응을 다투듯 얘기했다. 오전 내내 이런 분위기는 지속됐다. 그날은 이 세상에서 단 하나밖에 될 수 없는 ‘엄지곰 곰지’가 전 방송을 타고 이 세상에 태어난 날이었기 때문이다.
‘엄지곰 곰지’는 ‘엄지(손가락)만한 곰’이라는 설정 이외에는 그 곰이 인형인지 혹은 숲 속에 사는 요정인지, 남자인지 또는 여자인지에 대한 정확한 설정 없이 출발한 캐릭터였다. 어떻게 보면 무책임한 설정이지만 오히려 아주 작은 곰이라는 설정만을 던져놓고 전 제작 스태프들이 자유로운 상상력으로 제작되기를 원했던 것이다. 그리고 이런 시도는 기대 이상으로 성공해 ‘익숙한 사물에 대한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기’를 위한 접근방식이 되어 지금도 곰지는 전 스태프의 자유로운 상상력 속에서 늘 새롭게 탄생되고 있다.
설정과 소재는 단순하고 익숙한 것을 선택하되 이야기를 전개시켜 나가는 방식은 전혀 다른 시각을 시도했던 것이다. 이는 ‘엄지곰 곰지’의 주시청층인 유치원생들에게 보다 많은 창의력을 키울 수 있도록 하고, 애니메이션 상상력을 극대화하고자 선택했던 방식이었다.
또한 이러한 이야기 접근방식은 이미 완벽하게 설정된 이야기구조에서 출발하는 기존의 시나리오 작업과는 다른 시나리오 작업이 되었다. 그것은 6세의 아동들이 좋아하는 소재를 아이디어가 있는 몇가지 과정을 통해 반전이 있는 결말을 이끌어낸다는 아주 단순한 요구만을 가지고 애니메이션 상상력이 가미된 반전을 만들어 내야 하는 힘겨운 작업이 되기도 했다.
이렇게 편마다 기발한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요구하는 내용 때문에 시나리오 작가는 물론이고 모든 스태프들이 손가락만한 곰지처럼 시야를 낮게 맞추어 사물을 바라보기도 하고, 때로는 늘 엉뚱한 사건만 저지르는 ‘단지’가 되어보는 등 그 과정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멀고 힘들기만 했다.
그러나 긴 제작과정 속에서도 곰지 스태프진들은 자신들의 컴퓨터 모니터 위에 야광 곰지 인형을 부적처럼 올려놓고 곰지와 함께 동고동락을 한 끝에 마침내 이 세상에 태어나게 된 것이다.
그리고 곰지가 첫 방영된 날, 우리는 인터넷과 주위의 여러 사람들을 통해 곰지의 위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터넷 게시판에는 우리나라에서 제작한 작품이냐고 확인하는 문의가 빗발쳤고 혹자는 일본이나 다른 외국 작품을 베낀 것이 아니냐며 의심의 눈초리를 보냈다.
엄지곰 곰지의 주된 관심사는 상상력이다. 아이들의 놀라운 동화적 상상력은 생명이 없는 것들에게 생명을 불어넣어 주고, 일상을 재미있는 놀이로 만들어 버리고 평범한 것들을 신비하고 놀라운 것들로 바꾸어 놓는다. 우리 제작 스태프진들은 바로 그 평범함 속에서의 놀라운 상상력을 끝까지 놓치지 않고 ‘곰지’를 탄생시킨 것이다.
<심상명 에펙스디지털 이사 겸 감독 shim@fxdigital.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