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7년에 첫번째로 시도된 대서양 횡단 해저케이블 설치작업은 비록 실패로 끝났지만 경험측면에서는 매우 유익한 것이었다. 케이블이 한꺼번에 풀리기 직전까지 육지와 전선을 포설하던 배 사이에는 아주 온전한 통신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사이러스 필드는 남은 케이블을 추스리고 실패의 원인이 되었던 케이블 흘려보내는 기계를 전부 바꾸었다. 그 과정에서 일년이라는 시간이 지나갔다. 1858년 6월, 새로운 용기와 케이블을 실은 배들이 출발했다. 첫번째 모험에서 얻은 경험을 살려 대서양 한가운데서 각각의 배가 양쪽 대륙을 향해서 케이블을 설치하는 방법으로 진행했다.
그러나 이번에는 날씨가 문제였다. 사흘째 되던 날 ‘아가멤논’호의 선장은 은밀한 불안을 느꼈다. 거센 폭풍우가 다가오는 징조가 느껴졌기 때문이다. 실제로 나흘째 되던 날 태풍이 시작되었다. 그것은 대서양을 자주 항해하는 경험 많은 선원들도 극히 드물게 겪는 강력한 태풍이었다. ‘아가멤논’호는 대양에서 벌어진 모든 전쟁에서의 가장 가혹한 시련도 견뎌낸 배였다. 영국해군의 기함으로 그냥 있었다면 그 정도 날씨는 견뎌낼 수 있었을 것이었지만, 케이블 설치를 위해서 완전히 개조되었고, 엄청난 짐이 실려 있었다.
성난 파도는 갑판을 훑고 지나가며 모든 물건을 부수어 버렸고 석탄더미를 막아놓은 칸막이 벽을 무너뜨렸다. 많은 사람들이 다쳤고, 일부는 솥이 뒤집어지는 바람에 끓는 물에 심하게 데기도 했다. 선원 한 사람은 열흘 동안의 태풍에 그만 미쳐버리기도 했다.
선원들은 이제 극단적인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그것은 케이블을 바다로 내던지자는 것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선장이 모든 책임을 떠맡으면서 그 사태를 막았다. ‘아가멤논’호는 열흘간의 태풍으로 말로 다할 수 없는 고초를 겪은 후 좀 늦기는 했지만 케이블 설치를 시작하기로 약속된 장소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수천번 휘감긴 코일로 이루어진 케이블은 태풍으로 이리저리 부딪치면서 엄청나게 손상되어 있었다. 전선가닥은 서로 얽혀 있었고, 케이블을 감싼 구타페르카 껍질이 밀리거나 찢겨있었다. 결국 작업은 정지되고 말았다.
비록 대서양을 해저케이블로 연결하여 동시에 소식을 나누고자 했던 첫번째 작업과 두번째 작업이 실패로 돌아갔지만, 사이러스 필드의 끈질김과 이상주의는 전혀 흔들림이 없었다. 그는 오히려 잃어버린 것은 아무것도 없다고 설명하고, 배에 남아있는 케이블을 활용하여 다시 한번 시도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외쳤다. 필드의 설득이 사업성공의 가능성을 포기한 투자자들에게 기왕 그르친 것 될 대로 되라는 식의 기회를 부여받을 수 있었다. 강한 의지력을 가진 한사람이 망설이는 많은 사람들을 설득한 것이다.
두번째 실패 이후 다섯 주일이 지난 1858년 7월, 필드는 세번째로 영국의 항구를 다시 떠났고 바다는 친절하게 그들을 맞아들였다. 넓은 대서양 한가운데에서 두개의 움직이는 점이 되어 멀어져가는 동안 케이블을 통한 통신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매시간 한 쪽 배에서 대서양 깊은 곳에 내려진 케이블을 통해 전기 신호로 지금까지 통과한 마일 수를 보내왔고, 다른 쪽 배도 마찬가지로 좋은 날씨 덕에 같은 거리를 지나왔노라고 답변을 해왔다.
1858년 8월. 일시적일 지라도 마침내 인간의 말이 처음으로 아메리카에서 유럽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영국과 미국 국민들은 환호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축하행사에 참여했다. 하지만 그 전신기는 잠시동안만 정상 동작했을 뿐 환영행사가 끝나기도 전에 다시 침묵해 버렸던 것이다.
세번째 시도도 실패로 끝난 것이 밝혀지자 국민적 영웅이 되었던 사이러스 필드는 단 하루만에 세기적 사기꾼으로 전락해버렸다. 그리고 대서양은 또다시 수천년 동안 그랬듯이 극복할 수 없는 거리로 멀어지고 말았다. 19세기의 가장 대담한 계획이 거의 현실이 되는가 싶더니 다시금 전설이 돼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대대적인 환영행사까지 치른 상황에서 실패로 끝난 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의 가설은 그후 그 누구도 다시 시도하려고 생각하지 않았다. 끔찍한 실패가 모든 힘을 마비시켜 버리고 모든 열광을 질식시켜 버렸다. 세번째 작업이 실패로 끝난 뒤 6년 동안 대서양 횡단 전선가설을 위한 시도는 바다 깊숙이 가라앉아 버려진 케이블처럼 완전히 멈추어 있었다.
역사전개 과정에서 보면 한순간에 불과한 이 육년이라는 세월은 전기와 전기를 이용한 통신과 같은 새로운 기술의 영역에서 보면 천년과 맞먹는 시간이었다. 발전기는 더 정밀해졌고, 전선은 더욱 가늘면서도 저항이 적게 개발되었다. 통신장비들은 더 정교해졌으며, 그 범위가 한층 넓어졌다. 전보통신망은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곳곳으로 연결되어 대서양만 극복할 수 있다면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 어느 곳에서든 서로 소식을 주고받을 수 있게 되었다.
이러한 염원은 해마다 점점 환상의 영역을 벗어나고 있었다. 새로 시도할 순간이 불가피하게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새로운 에너지를 가지고 옛날의 계획을 실현시킬 사람이 없었을 따름이다. 그때 그 사업을 추진하려는 사람이 등장했다. 바로 사이러스 필드였다.
필드는 옛날과 똑같은 신용과 신뢰를 얻으며 오랜 침묵을 깨고 그 악의적인 경멸로부터 부활했다. 필드는 옛날에 받은 허가에다가 60만파운드의 새로운 자본을 더 보탰다. 그리고 마침내 오랫동안 꿈꾸어온, 배 하나에 모든 케이블을 다 실을 수 있는 거대한 배 한척도 마련되었다. 굴뚝 네개가 달린 2만2000톤급의 ‘그레이트 이스턴’호였다.
1865년 7월, 이 거대한 배는 새로운 케이블을 싣고 템스강을 떠났다. 그러나 첫 시도는 목표까지 이틀을 앞두고 케이블이 절단되는 바람에 실패로 돌아갔다. 또 한번 거대한 대양이 60만파운드의 돈을 삼켜버렸다. 그러나 이제는 기술적으로 아무런 문제도 없었기 때문에 필드를 비롯한 사람들은 성공에 대한 확신을 계속할 수가 있었다. 1866년 7월, 다시 ‘그레이트 이스턴’호가 출발했다. 성공이었다. 케이블은 아주 또렷하게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간 말을 전달했다. 며칠 뒤에는 잃어버렸던 케이블도 찾을 수 있었다. 두줄기의 케이블이 구대륙과 신대륙의 맥박을 같이하게 했다.
어제는 기적으로 여겨졌던 것이 오늘은 마치 당연한 일처럼 받아들여졌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은 동일한 심장박동을 가지게 되었다. 동시에 마음을 나눌 수 있게 되었으며, 필드는 당시 세계 8대 불가사이를 이룩한 인물로 평가받게 되었다.
네번, 다섯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대서양 횡단 해저전선을 가설한 사이러스 필드. 그가 그토록 강력하게 사업을 추진할 수 있었던 힘은 돈이 아니었다. 명예도 아니었다. 다만 대서양을 극복하여 유럽과 아메리카 대륙이 하나로 만들어졌을 때 인류가 영위할 수 있는 즐거움을 위해서였다. 사이러스 필드의 정보통신에 대한 그 가치확신과 의지는 1세기가 지나고 또 다시 반세기가 지나고 있는 지금까지 우리의 가슴을 설레게 하고 있다.
이 글은 자작나무에서 번역 발간한 슈테판 츠바이크의 ‘광기와 우연의 역사’를 참조했음을 밝힌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