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회준 KAIST 전자·전산학과 교수 hjyoo@ee.kasit.ac.kr
최근 반도체를 비롯한 전자산업 전반에 SoC에 대한 요구와 관심이 계속 커지고 있다. 미국·일본·유럽을 포함해 반도체 후발주자인 중국까지 앞다퉈 SoC산업 육성을 위한 정책을 입안하고 막대한 자금을 투입하는 등 다가올 SoC시대를 준비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금 국내에서 일고 있는 SoC 바람은 앞으로 우리나라가 SoC시대의 리더로 우뚝 설 수 있는 청신호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정보통신(IT) 기술은 전자(electronic engineering) 및 전산(computer science) 분야의 학문과 산업의 결합이다. 따라서 정보통신을 잘하기 위해서는 전자공학과 전산학 둘 중 하나가 아닌 둘 다 잘해야 하는 것이다. 즉 IT 시스템은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 모두에 부가가치가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미 90년대 인텔이 하드웨어를, MS가 소프트웨어를 석권하던 PC산업에서도 확인된 바 있다. 이 당시 미국에서 제품이 발명 또는 개발되면 그 핵심부품을 일본에서 양산하고 대만에서 조립해 미국시장에 판매하고 있었다. 이에 비해 우리나라는 미국으로부터 제품 기술을, 일본으로부터 대량 생산 기술을 전수받아 단순 제품을 값싸게 대량 생산하는 능력 하나만을 가지고 지금껏 버텨온 것이다.
하지만 21세기에 들어서면서 이러한 모든 상황이 크게 변하기 시작했다. PC산업이 포화되고 IT산업이 대두되면서 미국과 유럽 등 서구 세력이 약진하는 반면에 일본은 침체 일로에 서게 됐으며 중국의 산업화에 의해 단순 제품의 저가 생산은 중국이 주도하게 됐다. 이러한 변화는 우리나라가 저임금·저가격 제품 생산 능력만으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으며, 한국의 전자산업이 더욱 고도화돼야만 살아남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종래 미국 및 일본 산업구조하의 생산기지 역할에서 벗어나 세계를 대상으로 한국 중심의 분업화를 유도하고, 이를 통해 국가적 이익을 확보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 무엇을 무기로 내세워야 할 것인가. 필자는 반도체산업을 그 경쟁력의 하나로 들고 싶다. 한국의 반도체산업은 풍부한 양산 경험과 최첨단의 기술력, 활발한 벤처정신 등 세계 최강의 경쟁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제 이를 기반으로 PC시대의 주력 제품인 D램에서 IT시대의 주력 제품인 SoC로 전환한 뒤 이를 바탕으로 전자산업의 고도화를 꾀할 때가 온 것이다. 한국은 아시아 시장의 두 거인인 중국과 일본 사이에서 정치·경제적 중심에 위치하고 있으며 이 두 국가를 활용해 세계 SoC산업의 주도권을 잡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그렇다면 한국의 단점은 무엇인가. 가장 큰 문제점으로 시스템 개발 및 시장 형성 능력의 부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항상 미국과 일본이 개발한 제품, 이미 시장이 형성된 제품을 뒤따라 제작해 판매하다 보니 우리에게는 신제품을 제안하거나 부가가치가 높은 시스템을 제작하는 기술이 전무하다시피하다. 그러나 SoC시대에는 무엇보다도 이 두가지 능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따라서 우리나라가 이를 양성하기 위해 어떠한 접근 방법이 좋을 것인지 몇가지 방안을 제안해 보고자 한다.
SoC가 진가를 발휘할 수 있는 제품은 무엇이 될 것인가. PC와 같이 일정시간 교육을 받아야만 사용할 수 있는 ‘기술을 위한 제품’에서 ‘인간을 위한 제품’, 즉 별다른 교육 없이도 쉽게 사용할 수 있고 일상 생활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제품이 SoC시대의 총아로 등장할 것이다. 현재까지는 이동통신 중심의 제품군이 주류를 이루고 있지만 곧 디지털 가전제품에 SoC가 널리 사용될 것이다. 사람과 사람을 연결하고 사람에게 더욱 친근하게 다가서는 제품을 만드는 데 SoC가 중요한 역할을 할 것이다. 또한 애완 로봇이나 도우미 로봇 같이 인간이나 생명체와 유사한 제품을 제작하는 데 SoC가 널리 사용될 전망이다. 따라서 SoC는 단순한 제품이나 기술을 뜻하기보다는 하나의 시대를 지칭하는 단어로 볼 수 있다. 이는 PC시대의 D램처럼 어떤 특정 단위 기술이나 단위 제품만을 연구하거나 개발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기술 개발과 기업 문화까지 바꿔야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새로운 인력을 양성할 필요가 있다. 그동안 우리나라의 반도체 설계인력 양성은 반도체설계교육센터(IDEC) 중심의 VLSI 설계교육이 주를 이뤄왔다. 하지만 SoC 설계를 위해서는 단순 VLSI 설계교육뿐 아니라 부가적인 교육이 더 필요하다. 그러나 현재 자금지원의 부족으로 IDEC에서 SoC교육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SoC를 설계하기 위해서는 △개인적인 설계보다는 팀 중심의 설계 △사내외를 불문하고 필요한 IP를 구해 이를 ‘조립’해 설계하는 기술 △응용 소프트웨어까지 고려해 거시적으로 SoC를 최적화하는 기술 △복잡한 작업을 효율적으로 관리하는 기법의 활용기술 등이 필요하다. 이외에도 SoC시대의 주역이 될 벤처기업가들에게 품위있는 기업가 정신을 교육하고, 이를 뒷받침할 경영 실무에 대한 교육도 필수적이다. 이를 종래의 공학교육에 접목해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커리큘럼의 개발이 필요할 것이다.
SoC설계는 어느 한 분야의 정보만이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분야의 정보가 모여 시너지 효과를 발휘해야만 새로운 제품이 탄생할 수 있다. 이를 위해서는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소·벤처기업 모두가 정보 공유를 할 수 있는 개방형 교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즉 SoC라는 새로운 주제를 향해 기술간의 장벽, 회사간의 장벽 그리고 사람간의 장벽을 허물어 버린 오픈 시스템 또는 다양한 정보교류의 장이 제공돼야 할 것이다.
지금까지의 산업과는 그 성격이 크게 다른 SoC산업을 효율적으로 육성하기 위해서는 천문학적인 자금이 필요할 것이다. 우리나라와 같이 한정된 자금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나라에서는 SoC산업을 위한 효율적인 자금 투자가 절실하다. SoC사업을 인프라사업과 실제 제품 개발 사업으로 정확하게 나누고 효율적인 인프라 구축을 위해 국가가 하루속히 정책을 입안하고 자금을 투자하는 데 발벗고 나서야 할 것이다.
SoC 인프라는 미래의 가능성을 현실에 연결시켜 주는 것이며, 한국이라는 브랜드 밸류를 고양시키는 것이다. 과거 로마·영국이 그리고 최근 미국이 그러하듯이 경제영역을 네트워크(network)로 묶는 노력이 바로 인프라 구축사업이다.
현재 KAIST 산하의 반도체설계자산연구센터(SIPAC)에서 수행하고 있는 효율적인 IP DB 구축과 IP 거래 제도 연구, IP 표준화 작업은 한국의 SoC산업의 발전을 위해 멀리 보고 투자하는 좋은 인프라 구축 사업 중의 하나다.
이러한 방대한 작업을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리더집단이 필수적이다. 최근의 국내산업의 뜨거운 감자로 떠오른 하이닉스 사태에서도 보듯이 이러한 사업은 특정 회사 하나만의 문제가 아닌 전체 사회에 영향을 미치는 큰 사업이다. 이제는 더 이상 정부나 재벌 오너가 밀실에서 결정할 수 있는 단계가 아니다. 산업체와 학계 그리고 연구계 등 전문가 집단만이 아니라 정부와 재계 및 언론계 등 사회 전반의 리더들이 모여서 토론하고 합의점을 도출하는 제도의 마련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러한 사회 지도층의 주도에 의해 사회적인 합의점이 도출되고 이를 정책으로 입안해 강력하게 추진해 나간다면 한국이 그동안 세계에 보여줬던 D램의 신화를 SoC에서도 계속 보여줄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