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스템통합(SI)업체인 LGCNS는 최근 직급 자체를 완전히 폐지했다. 대리·과장·차장·부장과 같은 호칭을 그대로 사용하지만 업무 권한과 급여에는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인사제도를 전면 개편한 것이다. 새 인사제도에 따르면 전 직원은 팀원 아니면 팀장으로 구분된다. 임원만 별도로 구별했다. 쉽게 말해 부장이라도 대리가 팀장인 팀에서 팀원으로 일할 수도 있게 된 것이다.
LGCNS가 이처럼 인사제도를 파격적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정보기술(IT)의 덕택이다. LGCNS 박철현 대리는 “직급을 파괴하는 새로운 개념의 조직인사체계를 구축하는 데 있어 인적자원관리(HR)와 같은 IT시스템이 가장 큰 역활을 했다”고 밝혔다.
직원들은 분기별로 스스로를 평가하고 임원들은 이를 기반으로 다시 직원들을 평가한다. 연봉은 철저하게 능력 위주로 결정된다. 이 과정을 객관화하기 위해 SAP의 전사적자원관리(ERP) 시스템이 도입됐다. 승진·복리후생·인사 등은 ERP의 객관적인 데이터를 통해 평가·결정된다.
LGCNS는 ERP 시스템 도입으로 철저히 성과에 기초해 임금을 책정하는 ‘완전 연봉제’를 시행할 수 있었다. 직급체계도 팀을 조직의 최소단위로 정하고 그 위로 담당·부문·사업부의 3단계 조직으로 단순화했다.
기업들이 수직적 조직문화로 대변되는 연공서열제를 폐지하고 능력 위주의 혁신적인 인사제도를 잇따라 도입하면서 IT의 중요성이 강조되고 있다. 소프트웨어(능력평가)의 변화없이 하드웨어(직급) 도입만으론 그 효과를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수직적 조직문화가 능력 위주의 수평적 조직문화로 바뀌면서 승진 연한을 폐지하거나 입사 선후배간 직급과 연봉이 뒤바뀌는 현상이 비일비재해지면서 새로운 평가시스템 도입이 절실해졌다. 이에 따라 기업들은 새로운 평가시스템을 구축하기 위해 ERP 등 기업용 소프트웨어 도입이나 자체적인 시스템 개발에 나서고 있다.
대우정보시스템은 개인별 직무 성과와 능력을 중시하는 새로운 인사시스템을 도입했다. 이 회사는 각 직군 및 직무별로 서로 다른 평가기준을 적용하는 새로운 직원평가 및 보상시스템을 도입하고 개인별 실적과 능력에 따라 차별적인 보상을 하고 있다.
이에 따라 직원들의 능력을 효과적으로 평가하기 위해 실시간 평가시스템을 구축했다. 이 시스템은 직원들이 매월 또는 분기별로 직접 자신의 실적을 등록하고 이에 대한 평가를 곧바로 확인받는 시스템으로 업무성과 평가에 대한 오류를 크게 줄여 준다.
대우정보시스템의 설명환 대리는 “과거의 획일적인 평가와 연공서열형 급여체계로는 더이상 직원들에게 비전을 제시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새로운 인사시스템을 도입했다”고 말했다.
현대정보기술은 이른바 ‘브로드밴드 시스템’을 도입, 직급에 관계없이 능력과 성과에 따른 보상을 하고 있다. 이 시스템 도입으로 현대정보기술의 직원들은 능력에 따라 연봉이 매년 최대 20% 이상 차이가 난다.
SKC&C 역시 매년 직원별 기여도에 따라 연봉을 차등 인상하는 시스템을 도입했다. 인센티브는 회사 성과에 따른 이익 분배와 함께 개인별 성과에 따라 차등 지급한다. 또 12단계 직급을 운영하고 있으나 실제적으로는 직위로만 운영 중이다.
전문가들은 탄력적으로 조직을 운영하는 벤처기업의 급부상으로 계층구조가 없는 수평적 조직문화가 IT업계을 중심으로 급속도로 확대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최근에는 오프라인의 기업들도 능력 위주의 혁신적인 조직을 만들기 위한 정보시스템을 잇따라 도입하는 등 직급 파괴가 빠르게 확산하고 있다는 지적이다.
<김익종기자 ijkim@etnews.co.kr>
◆다국적 기업 `직급파괴`일반화
다국적 기업의 현지법인과 벤처기업에서 직급 파괴는 더이상 이야깃거리가 되지 않을 정도로 일반화돼 있다.
특히 미국계 IT업체들의 직급 파괴는 한국 업체 입장에서 보면 가히 상상을 불허한다. IT업무 성격상 경직되고 연공서열을 중시하는 분위기보다는 자율스럽고 능력 위주의 조직구성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세계 70여개국에 지사를 두고 있는 마이크로소프트는 ‘심플하고 공정한 인사제도’로 유명하다. 심지어 한국보다 연공서열을 더 중시하는 일본의 현지법인에서도 파격에 가까운 인사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의 일본 법인은 직급보다는 직무 위주의 인사제도를 도입하고 있으며 인센티브와 스톡옵션을 통해 일본 재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다. 한국의 현지법인인 ㈜마이크로소프트도 이와 비슷한 조직체계 및 인사제도를 운영 중이다.
한국오라클은 전 임직원의 직급을 완전히 폐지하고 사장·본부장·실장·팀장 등 4가지 직책을 호칭으로 사용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호칭상의 구분일 뿐 직무는 수평적이다. 인텔코리아는 지난 89년 설립 때부터 대표이사 외의 전 임원을 매니저로 부른다.
국내의 벤처기업 역시 직급 파괴를 주도했다. 지난 99년 인터넷 열풍이 몰아치면서 우후죽순 설립됐던 벤처기업들은 대기업들과 차별화된 경쟁력을 확보하기 위해서 직급을 파괴했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을 비롯한 인터넷 기업들은 아예 직급을 없앰으로써 조직원들의 자율성을 높였다. 다음커뮤니케이션은 평사원의 호칭을 마케팅 플래너, 인터넷 비즈니스 플래너, 메일 컨설턴트 등으로 변경했다.
◆미국식 브로드밴딩시스템
직급체계나 연봉제 도입만으로 수평적 조직문화가 형성되는 것은 아니다. 자칫 세심한 계획없이 조직체계를 바꿨다간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충분한 준비작업 없이 성급하게 직급단계를 축소·통합할 경우 이에 대한 명확한 기준이 없어 기존 연공과 학력에 의한 직급 운영이 바뀌지 않을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삼성경제연구소는 미국식 브로드밴딩 시스템을 직급체계의 구조조정 모델로 제시했다. 브로드밴딩 시스템은 직급수를 축소하면서 직급 내 급여범위를 확대하는 직급 구조조정 시스템의 하나. 제너럴일렉트로닉스(GE) 등 상당수 미국의 기업들이 이 시스템을 도입해 효과적으로 직급의 기준을 설계하고 있다.
브로드밴딩 시스템은 역할과 직무평가를 통해 명확한 직급을 설정하는데 이용된다. 직급설정은 스킬·성과·역량 등을 기준으로 한다. 이 시스템을 도입하면 승진없이도 동일한 직급 내에서 직무 이동이 가능하기 때문에 연공적인 지급에 관계없이 탄력적인 인력운영이 가능하다.
GE는 브로드밴딩 시스템을 도입해 10∼15단계에 이르던 직급을 평균 4단계로 줄이는 효과를 봤다. GE는 우선 12개의 핵심사업부문의 10개 사업부는 시간외 수당을 받지 않는 직원을 대상으로, 나머지 2개 사업부문은 시간외 수당 직원들을 대상으로 브로드밴딩 시스템을 적용했다. 여기에서 나온 결과를 토대로 각 사업부의 직원들의 급여가 연공이나 직무에 의해서가 아니라 능력과 성과에 따라 결정되는 조직을 구성했다. 이 과정에서 직급도 크게 줄어들었다.
인력관리 컨설팅업체인 왓슨와이어트컨설팅은 브로드밴딩 시스템을 이용해 직원들의 업무성과와 역량을 연결시킨 6단계의 직급구조로 나누고 개인의 직책에 관계없이 어느 구조에 포함되느냐에 따라 연봉이 결정되도록 했다.
전문가들은 직급파괴에 앞서 직원들의 의견을 수렴하는 과정이 중요하다고 강조한다. 필립모리스의 경우 직원들의 직급 구조조정에 대한 공감대 부족으로 브로드밴딩 시스템을 도입하자마자 철회하는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