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 서울 상암동 월드컵경기장에서 2002 한일 월드컵 개막식이 열렸다. ‘동방으로부터(From the East)’라는 주제로 진행된 개막식은 전통과 현대를 조화시키고, 상생의 정신을 표현해 참석한 관중들과 전세계 시청자들의 갈채를 받았다.
특히 월드컵 개막식 행사는 전체 컨셉트가 철저하게 정보통신에 관련된 내용이어서 더욱 관심을 끌었다. 환영과 기원, 소통, 어울림, 나눔으로 구성된 소주제 자체가 정보통신 특성을 포함하고 있었고, 많은 사람들이 공유해야 더욱 가치를 갖는 정보통신매체의 특징을 나타내듯이 관객과 출연자, 시청자 모두가 함께 어울리는 무대로 연출되었다.
첫번째 마당 ‘환영’은 세계의 손님을 환영하고 성공적인 대회운영을 비는 궁중무와 기원무로 시작되었다. 기원이란 하늘에 소원을 비는 것으로, 하늘과 통신을 시도하는 행위다. 출연자들은 진지한 표정으로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기(氣)를 통해 월드컵대회의 성공을 하늘에 빌었다. 우리민족이 큰 행사를 치르기 전에 늘 그래왔듯이 하늘을 향해 월드컵 행사기간 동안의 안녕과 평안을 기원하는 하늘과의 통신이었다.
둘째마당으로 전개된 ‘소통(communication)’은 말 그대로 정보통신 매체가 갖는 특성을 한편의 CF로 보여준 마당이었다. 각각 다른 언어를 사용하여 서로 소통할 수 없는 세계 각국의 어린이들이 자신의 마음을 종이배에 담아 띄워보낸다. 그 종이배들은 상암경기장 개막식장으로 모여들었고, 월드컵 본선 참가국 수와 같은 조각배 32척으로 변해 그라운드 중앙으로 모였다.
이어 음양(陰陽), 동서(東西)를 형상화한 두 개의 대형 북이 고놀이 형태로 등장하여 소통을 시도했다. 이때 대규모로 등장하는 북은 원시통신의 상징적 도구였다. 소리의 높고 낮음과 길고 짧음으로 서로 통신을 수행하던 북이었지만, 언어가 통일되지 않아 원활한 소통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소통을 위해 디지털광대가 등장한다. 그리고 음과 양 두 개의 북은 합쳐져 온전한 원을 만들고, 온 세상은 소통의 기쁨을 누린다.
이 과정에서 북과 장고가 첨단 디지털기술과 결합하여 장쾌하고 역동적인 리듬을 만들어 내고, 그 소리에 맞춘 군무가 조화롭게 이어져 ‘과거와 현재의 대화’를 현실적으로 형상화한다. 형형색색 전통복장을 한 출연자들과 얼굴을 LCD 모니터로 장식한 디지털광대는 옛날과 현대, 아날로그와 디지털, 현실과 꿈을 소통시키고 이어주는 매체로 활용된다.
즐겁고 흥겨운 소통의 중간에 잠깐이지만 IMT 2000 시연이 이루어졌다. 관중의 모습이 휴대전화의 카메라를 통해 통신으로 전달되어 전광판에 비치는 모습, 아마도 세상의 많은 사람들은 그 시연이 갖는 중요성을 인식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라운드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개막식을 휴대전화기 한 대로 세계 어느 곳이든 실시간으로 보여줄 수 있는 그 가치를 이해 할 수 없을 지도 모른다. IMT 2000 시연은 강력하고 명확하게 IT 대한민국을 세계에 알렸고, 우리의 미래, 우리의 정보통신 기술을 통해 새로운 세계기준을 만들어 가겠다는 의지를 표현한 시연이었다.
개막식행사는 셋째마당 ‘어울림’으로 이어졌다. 많은 관중들이 손으로 내려보낸 거대한 흰색 천이 제주 한란의 향기를 풍기며 그라운드 전체를 씨줄, 날줄로 뒤덮어 흰색의 어울림 바다를 만든다. 한 폭의 그림이 그려지고 그 한 가운데 에밀레종 형태로 만들어진 ‘평화의 종’이 불쑥 솟아오른다. 종이 울리면서 LCD 모니터에서는 백남준씨의 비디오 영상 ‘축구를 통한 인류화합’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개막식의 상징물로 등장한 종도 통신을 위한 도구였다. 북이 가까운 곳에 신호를 보내는 통신 도구라면 종은 먼 곳에 신호를 보내는 통신도구였다. 개막식에 등장한 종은 세계평화의 종으로 명명된, 평화의 메시지를 세계에 전하는 상징적 통신도구로 활용되었다.
마지막 마당 ‘나눔’에서는 32개국 고유의상을 입은 각국 어린이들이 ‘상암 아리랑’을 함께 합창했다. 우리의 고유가락 아리랑을 신나게 노래하며 미래와 희망을 제시했다. 그 미래와 희망은 정보통신 매체를 활용하여 이룩할 수 있는 바로 그 세상이었다. 또한 모두가 함께 흥겹게 따라부른 상암 아리랑은 우리의 소리와 우리의 가락과 우리의 흥을 전세계에 전달한 멋진 가락이었다. 세상 모든 인종과, 문명, 언어가 함께 공존할 수 있게 하는 정보통신 매체의 특성을 우리고유의 음으로 흥겹게 바꾸어 세상사람들이 함께 따라 부르게 했다는 점에서 매우 뜻깊었다.
서울 잠실종합운동장에서 있었던 88서울올림픽 개막식 주제는 ‘벽을 넘어서’였다. 많은 벽들이 존재하던 당시 그 벽은 개막식 행사에서도 어쩔 수 없는 무게와 경직성을 지니고 있었다. 그때는 인식하지 못했을 지라도 이번 월드컵 개막식 행사를 보면서 느낄 수 있었던 경직성이었다. 단 한 줄도 틀리지 않았을 만큼 경직되었던 88서울올림픽 개막식과는 달리, 이번 개막식 출연자들의 표정은 자연스러웠고 여유가 있었다. 자신에 차 있었다. 그동안 많은 어려움 속에서도 우리는 이미 성장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던 행사였다.
월드컵 개막식이 열린 상암 경기장은 88서울올림픽 때만 해도 외국 기자들의 취재를 막았던 난지도 쓰레기장 자리였다. 온갖 오물이 다 모여 쌓이고, 그 침전수로 고약한 냄새를 풍기던 바로 그 곳이었다. 그 위에 불과 2년 만에 세계인들의 시선을 집중시키는 아름다운 경기장과 공원이 만들어져 흥겨운 개막식 행사가 치러졌다. IMF 경제위기 상황에서 겪었던 우리 민족의 아픔을 한꺼번에 날려버리고 새로운 도약과 활력에 대한 자신감을 찾을 수 있는 행사로 모자람이 없었다.
특히 온 인류의 갈등과 분열을 추스리고 평화롭게 공존시킬 수 있는 정보통신을 주제로 개막식이 진행되었다는 것은 세계 최강의 정보대국을 노리는 우리나라의 힘과, 앞으로 해야할 일을 세계에 자랑하고 선포한 행사이기도 했다.
지구촌의 축제, 월드컵은 시작되었다. 우리는 이미 유럽의 강호 폴란드를 맞아 멋진 숭리를 거두었다. 경직되지 않고 창의적이었다. 빨랐다. 승리 자체도 자연스러웠고,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스피드와 창의력, 강한 체력과 기술이 월드컵 사상 첫 승의 조건이 되었다.
승리에 대한 조건은 IT사업도 마찬가지다. 경직되지 않고 빠르게 대응해야만 승리할 수 있고, 그 승리조차도 자연스럽게 느껴질 정도의 노력이 IT 대한민국을 계속 지켜나갈 수 있다. 게임에서 승리한 축구대표팀뿐만이 아니라 당당하게 세계 최강을 지켜가고 있는 IT 사업 종사자들에게도 승리의 환호를 보낸다.
축구를 통한 세계평화와 희망찬 미래를 기원하는 우리민족의 염원을 아낌없이 발휘한 역작으로, 동양철학에 기반한 음양사상을 장중하고 세련된 색채 속에 보편성을 확보하여 예술과 현대의 첨단과학을 잘 조화시켰다는 평가를 받은 2002년 한일 월드컵 개막식. 그 개막식의 핵심은 IT였다. 다른나라에서 범접할 수 없는 IT 능력을 세계인들에게 보여준 것이며, 때문에 행사 중에 흥겹게 불려진 상암 아리랑은 곧 ‘IT 아리랑’이기도 했다.
월드컵 개막식에 울려퍼진 ‘IT 아리랑’이 전 세계인들이 흥겹게 따라 부를 수 있게 되기를 기대하며, 다시 한번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과 함께 우리의 IT 선수들에게도 건투를 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 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