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보사피엔스 이야기>(21)비서 로봇.

공인회계사(CPA)시험을 몇 년씩 준비하는 고시생들을 보면 재미있는 현상이 가끔 발견된다. 밤낮없이 숫자와 씨름하는 친구들이 학교매점에서 빵, 음료수값을 제대로 셈하지 못해 주위의 실소를 사는 경우가 종종 발생한다. 모든 수식연산을 휴대형 계산기로 두드려서 확인하다 보니 정작 머리속의 연산기능이 일시적으로 퇴화한 것이다. 이처럼 기계에 정보처리를 의존하면서 인간의 두뇌능력이 점점 퇴화하는 현상을 가리켜 ‘디지털 건망증’이라 부른다.

정보처리를 기계에 의존하면서 두뇌의 고유한 판단능력이 장애를 겪는 현상은 교육계에도 점차 골칫거리로 떠오르고 있다.

요즘 어린이들은 인터넷, TV 등 발달된 정보매체 덕분에 분명 예전보다 지능이 높아졌다.문제는 구구단과 덧셈, 뺄셈을 하는 계산능력이나 여러개의 정보를 한꺼번에 기억하는 암기능력은 학년이 내려갈수록 낮아진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일선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어린이들의 학습능력 지체현상에 대해 매우 우려하고 있으며 몇 년 안에 중·고교와 대학가에도 파문은 확산될 전망이다.

 휴대폰이나 PDA 같은 휴대형 정보기기의 성능이 비약적으로 향상되면서 전화번화나 사람이름, 데이트약속, 회사업무 같은 일상의 기억(뇌세포)은 점차 전자식 메모리로 대체돼간다. 단지 인간의 머리로 기억하는 것보다 훨씬 더 정확하고 오래가며 편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갈수록 복잡하고 바빠지는 사회생활,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아침마다 수십개의 스팸메일을 삭제하는 과정 속에서 디지털건망증은 현대인의 보편적인 심인성 질환으로 확산되는 추세다.

 이런 관점에서 디지털건망증에 걸린 사람의 편에서 의미있는 정보만 걸러주고 수시로 기억을 상기시키는 비서로봇의 개념은 향후 로봇업계에 꽤 유망한 아이템이라 생각된다.

 비서로봇은 객관적인 정보검색뿐만 아니라 주인을 위해서 반갑지 않은 손님이 전화올 때는 화장실에 갔다고 둘러대는 재치도 있어야 한다.

 이미 직장업무의 로직을 이해하는 대화형 프로그램은 미국서 개발된 상태다. 국내 한 벤처업체는 PDA와 마우스로봇을 결합한 모습에 서류를 들고 책상 사이를 누비는 비서로봇의 개념을 설계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똑똑한 비서로봇이 등장한다 해도 인간은 자신의 두뇌를 활용하는 것을 결코 게을리해선 안된다. 디지털건망증은 치유가능한 일시적 장애지만 계속 방치할 경우 ‘디지털 치매’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부모님께서 얼마전 구입한 신형 휴대폰에 친척들 전화번호를 모두 입력해 달라고 하신다. 자식된 도리로 전화번호를 기입하면서도 영 기분이 찜찜하다.

 육체든 두뇌든 지속적인 운동은 건강을 위해서 반드시 필요한 법인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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