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간 75만톤 규모의 납사분해공장을 운영하고 있는 LG석유화학(대표 김반석 http://www.lgpetro.com). 석유화학업체라는 특성상 다소 경직된 점이 없지 않았던 이 회사에 얼마 전부터 새로운 바람이 불고 있다.
지난해 7월 지식관리시스템(KMS)을 도입한 후 직위 고하를 막론하고 서로 정보를 나눠가면서 보다 발전된 의견을 제안하는 분위기가 마련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회사 KMS망에는 현재까지 500여명의 임직원이 내놓은 2000여건의 생산 및 공정 관련 핵심 지식이 등록돼 있으며 이러한 지식은 32명의 각 부문 관리자들에 의해 선별·관리되고 있다.
초기에는 대부분의 임직원들이 새로운 시스템에 익숙치 않아 어려움도 많았지만 시스템 가동 후 얼추 1년이 되가는 지금은 모든 임직원들이 KMS를 통해 새로운 정보를 얻는 등 업무에 활용하고 있다. 자신만의 노하우나 핵심 정보를 공유하는 풍토가 자리잡게 된 것이다.
정보기술(IT)을 통한 나눔의 문화가 기업의 새로운 문화로 자리잡고 있다.
과거 몇몇 소수만이 자신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통해 각종 고급정보를 독점하던 문화가 사라지고 사장부터 평사원에 이르는 전 조직원들이 동등하게 모든 정보를 공유하는 문화가 자리잡고 있다. 고급 정보를 접할 수 있는 조직원들은 지속적으로 정보를 습득해 가며 업무능력을 키워가는 사이 정보에서 차단된 조직원들은 일정한 수준에서 정체하는 ‘빈곤의 악순환’이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이제는 모든 임직원들이 개인주의, 부서별 이기주의에서 벗어나 조직의 발전을 위해 정보를 공유하고 조직 차원에서도 이러한 나눔의 문화를 장려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나눔의 문화를 가져온데는 정보기술의 역할이 컸다. 인터넷을 통해 대면 접촉이 아닌 ‘온라인 접촉’이 가능해지면서 활발한 정보교환이 가능케 된 것이다.
최근 기업들이 앞다퉈 도입하고 있는 KMS는 가장 대표적인 ‘나눔의 문화’ 중 하나다. 각자가 보유한 핵심 지식을 사내 온라인망에 게재해 공유함으로써 이를 통해 개인의 발전은 물론 회사의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
인터넷메신저도 나눔의 문화조성에 한몫 거들고 있다. 인터넷을 통해 실시간으로 정보를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신저는 일 대 일뿐 아니라 일 대 다수, 다수 대 다수의 커뮤니케이션도 가능해 보다 편리하게 정보를 공유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나눔의 문화가 쉽게 자리잡은 것은 아니다. 한 통신장비업체의 영업부에 8년째 근무하고 있는 박 차장(37)은 과거 입사 초기의 기억을 떠올리면 아직도 쓴 웃음을 짓는다. 경쟁사 영업사원들의 견제만 이겨내면 ‘영업맨’으로서 성공적인 출발을 이뤄낼 수 있을 것이라는 예상과 달리 입사 한 달도 채 안돼 내부의 벽에 부딪혀 어려움을 겪었기 때문이다.
시장 및 고객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었던 박 차장은 부서 선배에게 주요 고객과 경쟁사 고객들의 정보를 부탁했다가 거절당했다. 선배의 말은 한마디로 ‘내가 땀흘려 구한 정보를 그냥 줄수는 없다며 너도 노력해서 너만의 정보를 쌓아가라’는 것이었다.
일리있는 말이었지만 박 차장은 수긍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같은 회사 사원인데 정보를 공유해 협력한다면 더 좋은 실적을 올릴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박 차장의 요구는 묵살됐고 결국 박 차장은 자신만의 고객정보를 만들기 위해 백지상태에서 힘들게 시작했다.
이처럼 힘들게 영업생활을 시작한 박 차장이지만 어느 정도 경력을 쌓은 지금 자신의 후배들에게는 아낌없이 정보를 나눠주고 있다. 자신이 불합리한 문화 때문에 힘들었던 것을 후배들도 되풀이 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는 이유에서다.
이처럼 나눔의 문화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IT차원의 지원도 필요하지만 무엇보다 기업 구성원들의 인식이 바뀌는 것이 가장 중요한 것으로 지적되고 있다.
하나를 나눔으로써 반이 되는 것이 아니라 두 개로 만들 수 있다는 인식이 자리잡아야 나눔의 문화가 정착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공통된 목소리다.
◆부작용은 없나
최근 기업내에 정보시스템을 통한 나눔의 문화가 자리잡으면서 새로운 바람을 불고 있지만 그 효용성 못지 않게 부작용도 적지 않게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문제는 새로운 문화를 수용하는 과정에서 겪을 수밖에 없는 통과의례지만 심할 경우 새로운 것의 유입 자체를 막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심각성을 간과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다.
◇공유 vs 사유
식품업체 A사 영업부 김 부장(48)은 요즘 심기가 편치 않다. 몇 달 전 회사에서 KMS를 가동한다는 소리를 듣고 ‘그게 뭐지’하며 한 귀로 흘려버렸는데 그 KMS 때문에 여간 신경이 쓰이는 게 아니다.
김 부장의 고민은 이렇다. “지난 20년간 정말 발바닥에 불이 나도록 뛰어다니며 지금의 인맥을 쌓았어요. 제가 부장에까지 오른 것도 다 그동안 쌓아온 인맥을 통해 남들보다 높은 영업실적을 올렸기 때문이죠. 그런데 그동안 만나온 사람들의 연락처는 물론 성격·취미까지 정리해온 나만의 X파일을 공개하라는게 말이나 됩니까.”
김 부장은 KMS 도입 이후 자신의 X파일을 전수해 달라는 후배들의 끈질긴 요구를 받고 있지만 철저히 외면하고 있다.
“물론 정보를 나누면 회사 전체에 이익이 된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이 아까운 것을 어떻게 남에게 줍니까”라며 흥분하는 김 부장의 불만은 나눔의 문화가 자리잡기까지는 아직 험난한 여정이 남았음을 보여준다.
◇효율 vs 비효율
B증권사에 근무하는 입사 1년차 윤모씨(28). 그는 아침에 출근 후 PC를 켜자마자 인스턴트 메신저를 실행시킨다. 친구들이 몇 명이나 들어왔는지 확인한 윤씨는 바로 접속돼 있는 친구들에게 아침 인사를 날린다.
윤씨가 메신저를 이용하는 것은 한가한 아침 시간뿐이 아니다. 증권시장이 한창 열기를 더해가는 마감 직전은 물론 마감 후 결산시간에도 수시로 친구들과 잡담을 나눈다.
그는 “가급적이면 업무 중에는 메신저를 꺼놓을려고 하지만 잘 되지 않는다”며 “한창 업무를 보다 메시지를 받으면 업무 효과가 떨어지는 게 사실”이라고 말했다.
이처럼 메신저가 업무의 효율성을 떨어뜨린다는 문제점이 제기되면서 일부 기업에서는 외부 사람들과 주고받을 수 있는 메신저의 사용을 금하고 있다. 실제로 삼성그룹은 지난달 삼성전자·삼성SDS 등의 계열사에 MSN·다음 등의 사외 메신저 사용을 금지시켰다.
◇토론 vs 비방
지난 3월부터 사내에 익명 온라인게시판을 개설한 제조업체 C사. 임직원들간에 서로 정보를 교환하고 활발한 토론을 벌이는 열린공간을 만들겠다는 의도에서 시작됐지만 3개월이 지난 지금 게시판은 당초 기대와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다.
발전적인 의견과 유용한 정보보다는 인신공격 수준의 적대적 발언이 넘쳐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익명 게시판이니 회사의 정책에 대해 잘못된 점을 지적하는 발언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지만 특정인을 지목해 비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아 문제가 되고 있다.
이 회사 관계자는 “애초에 직원들이 회사에 대해 솔직한 의견을 밝힐 수 있도록 익명제도를 택했지만 생각보다 부작용이 많아 고민”이라며 “아직 초기 단계니 만큼 어떠한 조치를 취하기 보다는 건전한 토론문화가 정착되기를 기다리는 중”이라고 말했다.
◆도입성공사례
“각자 업무를 진행하면서 쌓아온 노하우를 동료 직원들과 나누니 업무 생산성이 높아지는 것은 물론 동료간에 우애도 다질 수 있어 일석이조입니다.”
현대투자신탁증권(대표 이창식) 영업부에 근무하는 조영준씨(30). 그는 지난해 9월 KMS가 도입된 후 하루가 멀다하고 자신이 갖고 있는 주요 정보를 사내 전산망에 등록시킨다.
일주일에 한 건 정도는 자신이 직접 만든 시장자료를 등록하고 인터넷검색 중 유용한 콘텐츠를 발견하면 수시로 KMS에 올린다.
조씨는 “과중한 업무속에서 직접 자료를 만들기가 다소 버거울 때도 있지만 내가 등록한 정보가 동료들에게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만큼 보람도 크다”고 설명했다.
현대투자신탁증권은 지난해 9월 기존 그룹웨어시스템에 KMS를 도입한 ‘베스트넷Ⅱ’를 구축, 가동에 들어갔다.
시장트렌드·노하우·연구보고서·전문가Q&A·설문조사·포럼·지인관리 등으로 나뉘어진 ‘KM’을 비롯해 커뮤니티·마이페이지 등으로 구성된 ‘베스트넷Ⅱ’는 현재까지 총 2900여건의 지식이 등록되는 등 조직원들로부터 많은 호응을 얻고 있다.
특히 현투증권은 지식 등록이 활발한 우수 사원들에게 그에 상응하는 보상을 내리기 위해 정확한 평가에도 힘쓰고 있다.
임직원이 지식을 작성해 등록하면 각 분야별 ‘K-마스터’가 정보수준을 평가해 1차 등급을 부여하고 이를 심사위원회가 검토해 최종 등급을 내리는 식으로 정보 평가를 공정하게 진행 중이다.
물론 아직 도입한 지 1년이 채 안되 임원급의 참여가 적고 양질의 고급정보 등록 부족 등 문제점이 없지는 않지만 현투증권은 KMS 도입을 통해 그동안 정보공유에 인색했던 기업문화가 서서히 바뀌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앞으로 현투증권은 보다 현실적인 보상제도를 위해 인사고과와 연계한 포상제도 실시, 우수사원에 대한 연수기회 제공 등을 마련해나갈 계획이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