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6월. 대마왕이 도리의 업그레이드 골드 검을 세방 맞고 사라짐으로써 ‘레카’ 시리즈가 종영됐을 때 TV 앞에 모였던 드림픽쳐스21(DP21) 식구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서로에게 그리고 자신에게 박수를 보냈다.
작년 7월 21일 ‘레카’ 첫방 때도 꼭 이렇게 한자리에 모여 박수를 쳤지만 그때의 감격과 희열에 찬 그것과는 다른 오히려 할 말이 많음에도 한번 더 감정을 추스르려 심호흡을 하는 그런 느낌의 박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레카’라는 제목은 히브리어 ‘레크 레카(leke lexa-너를 위한 길을 가라)’에서 빌려온 것이다.
제목에서 연상할 수 있듯이 ‘레카’는 도리와 그 친구들의 여행과 그 여정 속의 고행과 난관들 그리고 고난을 뚫고 귀향했을 때 변모한 스스로의 모습을 발견하는 과정을 그린 성장드라마다. 마찬가지로 기획단계로부터 종영까지 근 3년이 걸린 이 작업을 마무리해낸 우리들은 조금씩들 성장하고 변모한 스스로의 모습을 새삼 발견하고 있다. 작업초기 여타 프로덕션에 비해 신입 비율이 높아 다소 불안감을 갖게 했던 제작진들은 어느새 어느 곳에 내놓아도 어엿한 경력자의 면모를 갖추고 있고 작은 일에도 노심초사하던 필자 역시 꽤 배짱이 두둑해지고 자신감이 붙어있음을 느낀다.
그리고 시작(始作)보다 완결(完結)을 사랑하는 법을 배운 것이 기나긴 ‘레카’ 작업의 가장 큰 성과였으며 가장 변모한 우리의 모습이 아닐까 싶다. 여하간 도리 일행이 귀향 직후 다시금 새로운 모험을 꿈꾸듯 DP21 식구들 역시 새로운 여정을 준비하고 있다. 첫 여행의 준비처럼 들뜨고 부산한 모습이 아니라 익숙하고 오랜 일과처럼 차근차근히 말이다.
한국에는 생각보다 많은 애니메이션 마니아들이 있다. 각종 미디어 매체들이 그 중독증 자체를 무시하고 있을 때 그들은 모든 음성적인 루트인 해적판 만화, 불법복제 비디오 그리고 와레즈 사이트 등을 통해 갈증을 충족시켜왔다.
당시 그들이 선호하던 컬렉션은 99% ‘재패니메이션’이었다. 이제 국내에서도 수입이 양성화되고 전문 케이블이 생기면서 애니메이션은 어린이들의 유치한 문화에서 수많은 독자층을 확보한 주류문화의 한줄기가 되는 등 산업의 반열에 오르게 되었지만 사정은 별반 바뀐 게 없다.
아직도 그들 마니아의 컬렉션 리스트에 한국 애니메이션은 거의 한편도 올라있지 못하다. 구태여 그 이유를 물어볼 필요가 없지 않나 싶다. 일단 대중에게 노출된 양에 있어서도 한국 애니메이션은 ‘재패니메이션’과 상대가 되지 않는다. 심지어 방송국 관계자들 조차도 국산 애니메이션 틀기를 주저한다. 성우료나 제작비도 3배나 비싸고, 값싸고 검증된 일본만화에 비하면 단가도 비싸며 위험도 높다는 것이다.
이래저래 천덕꾸러기인 한국 애니메이션을 가장 비참하게 만드는 것은, 비록 제작자 스스로의 자충수 결과지만 봐야 할 사람들이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마니아를 대상으로 하는 작품은 일본의 히트작을 모방하면서 정작 그들에게 신성모독의 죄를 지었고, 성인물을 표방한 작품은 성인들의 호감은 커녕 미성년자들의 호기심도 얻지 못했으며, 소위 본령이라 할 수 있는 아동물과 청소년물에선 그들의 기호 자체도 파악하지 못한 채 유치하고 진부한 내용 그리고 그 반대급부 격인 어줍은 교훈으로 마무리하려는 매너리즘으로 청소년과 아동은 물론 유아들의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있다.
DP21의 박지연 작가가 언뜻했던 이야기가 생각난다. 자신이 초등학교 때 여명의 눈동자라는 드라마를 했는데 초등학생 사이에서도 폭발적인 인기였었고 그 내용이 어려워 이해못하는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는 것이다.
어린시절을 떠올려보면 아무리 복잡한 드라마라도 어느 정도는 이해를 했고 또 재미있게 봤으며 생각보다는 그렇게 유치하지 않았던 것 같다. 이제 세살이 된 딸아이조차도 내가 그 나이 때 누리지 못했던 양과 질의 경험과 문화를 이미 누리고 있는데 하물며 영상언어 차세대쯤 되는 요즘의 초등학생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레카’의 주 타깃층은 바로 여명의 눈동자를 소화해 낸 유치하지 않은 어린이들이었다.
<육현수 드림픽쳐스21 제작실장 suns12@hanmi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