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유산업의 조치환 전산실장은 외부 사람을 만날 때마다 스스로 ‘기업문화를 주도하는 일꾼’이라고 소개한다. 최근 1년간 통합시스템 및 영업자동화시스템(SFA)을 구축한 이후의 변화다. 1년전만 해도 전산실의 주요 업무는 현업부서를 지원하는 수준에 그쳤다. PC·프린터 등 각종 기기가 고장났으니 고쳐달라는 주문에서부터 교체 업무까지 전산실 업무 자체가 그야말로 잡무 수준이었다. ‘잘해야 본전’이라는 피해의식이 만연해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새로운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서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기업 업무가 통합되고 정보 공유가 중요해지면서 전산실의 위상도 차츰 높아지기 시작했다. 이에 따라 조 실장의 업무도 시나브로 단순 지원업무에서 기획·조정 업무로 바뀌고 있다.
조 실장은 “전산실은 이전에는 고립화돼 있는 특정 부서라는 인식이 만연돼 있던 것이 사실”이라며 “현업 부서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늘어나면서 점차 개방되고 있는 추세”라고 말했다. 때문에 ‘잘하면 본전, 못하면 피박’이라는 자조의 목소리도 점차 줄어들고 있다고 강조했다.
전산실이 기업내 신IT문화의 중심지로 변하고 있다. 모든 업무가 IT와 직결되면서 전산실의 중요성은 높아져만 가고, 특히 경쟁력 극대화를 위한 신IT문화 창조 조직으로 부각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신IT문화를 만들어나가고 있을까.
이젠 전산실 업무자체가 신IT문화의 발생을 가져온다고 보면 무리가 없을 것으로 보인다. 전사적자원관리(ERP)·그룹웨어 등 각종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과정을 보자. 현업 사용자와 전담팀을 형성해 기업내 IT의 중요성을 자연스럽게 설파할 수 있다. 시스템이 본격적으로 가동되면 정착화될 때까지 전산실은 지속적으로 이를 지원하게 된다. 이후 각종 프로젝트를 재통합하는 과정에서 기업내부의 커뮤니케이션 체제를 강화하는 효과가 발생한다.
이런 추세에 따라 전산실 스스로의 변화도 두드러졌다. 페쇄적이던 조직이 개방화돼 현업 부서와의 협업에 초점을 맞춰 프로젝트를 추진하기 시작한 것이다.
대화제약의 안분연 전산실장은 “불과 몇 년 전만 해도 전산실이란 곳이 너무 소극적이어서 무엇인가를 새로 추진하기가 힘들었다”며 “하지만 지금은 새로운 기업문화를 만든다는 각오로 새로운 프로젝트를 매년 추진하는 등 생동감이 넘친다”고 밝혔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전산실 직원이 5명 미만에 불과한 중소기업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삼홍사의 정달진 전산부장은 “코볼 등 각종 언어를 이용해 프로그래밍을 개발하던 이전과는 달리 패키지를 도입하며 체질이 바뀌고 있다”며 “전체 업종이 시스템화되기 때문에 과거의 생각으로 현업을 지원하기는 어려운 추세”라고 강조했다. 디지털산업단지의 제조부문 회장을 맡고 있는 정 부장은 “업종마다 다르기는 하지만 중소기업에서도 전산실이 단순 지원업무를 한다는 소극적인 자세에서 기업문화를 만든다는 핵심부서로의 인식이 파급되고 있다”고 설명했다.
전산실의 위상 변화는 정보기술(IT) 총책임자인 정보화담당임원(CIO)의 달라진 위상에서 보면 알 수 있다. 전산실의 총책임자로 기업의 IT전략을 수립, 실행하는 수준에서 구매 등 핵심 업무까지도 범주에 포괄되며 경영활동에 근접하기 시작한 것이다.
유영민 LG전자 상무(CIO)는 “올초부터 구매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할 수 있는지 등의 전략구매 부문까지 전담하게 됐다”며 “이는 IT자체가 전사적인 업무와 직결되면서 생긴 새로운 추세”라고 말했다. 현대건설의 이정헌 상무(CIO)는 월요일마다 관리본부 회의에 IT기획팀이 정규부서로 참여하는 사실을 새로운 변화라고 말한다. 몇 년 전만 해도 외곽부대라는 인식이 지배했으나 이제는 핵심부서로 인식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매번 회의 때마다 자재부·해외영업부·총무부 할 것 없이 신규사업으로 IT관련사업을 발표하다보니 IT부서는 이를 지원해야 하는 막중한 임무까지 떠맡는다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하다고 강조했다.
CIO의 역할 중 일부 경영업무가 포괄되며 비IT전문가도 CIO로 등극하는 경우가 늘고 있다. LG칼텍스정유(박원표 상무)·풍산(류시경 이사)·코리아나화장품(유학수 이사)삼천리(강병일 전무)·서울우유협동조합(이만재 상무) 등 셀 수 없을 정도로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특히 금호건설의 신훈 사장과 금호생명의 송기혁 사장처럼 CIO로서 인기를 누렸던 인물들이 이제는 CEO로 올라서 기업의 e전이(transformation)를 총책임지고 있는 현실을 보면 전산실의 변화에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전산실의 수장이 경영활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기 시작하면서 기업문화를 능동적으로 바꿀 수 있는 기회도 많아졌다는 논리다.
현대경제연구원의 이장균 연구위원은 “경쟁에 도태되지 않기 위해서라도 전산실의 변화는 필연적인 결과”라면서 “현업에서 요구하는 각종 신IT문화를 제대로 지원하는데 초점을 맞춰 업무의 변화가 이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신IT문화의 중심지로서 전산실의 변화는 업무까지도 바꿔버리고 있다. 그동안 솔루션이나 하드웨어 업체들의 제품을 구매하는 수요자에 불과했으나 이런 수동적인 관계에서 벗어나 이제는 직접 개발한 솔루션을 외부에 판매하는 적극성도 띠고 있는 추세다. ‘눈에 보이는 성과 없이 돈만 들어간다’라는 인식을 탈피해 신규업무로 수익창출까지도 노리는 공격적인 변화다.
한국투자신탁증권은 이미 교보투자신탁·제일투자신탁·농협 등 7개 금융기관에 공급한 바 있는 종합자산운용시스템(TAMS) 공급을 확대해 나가기로 했다. 이를 위해 한투는 시스템환경의 변화를 고려해 우선 내부적으로 버전향상작업을 추진하고, 자산운용업무를 취급하는 금융기관을 중심으로 마케팅 활동을 강화할 예정이다. 제일모직 패션부문도 현재 200여개 이상의 자사 협력사를 대상으로 운영하고 있는 의류생산 정보공유 시스템을 같은 산업내 대기업에 공급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 중이다.
국내뿐만 아니라 해외 수출용으로까지 확산하려는 움직임도 있다. LG건설은 주택부문에 적용돼 연간 40억원의 절감효과를 내고 있는 철근자동화시스템 ‘바스(BAS)’를 건설업계에 확산시키기로 했다. 이 시스템은 이미 롯데건설·현대산업개발·코오롱건설·벽산건설 등 7개 대형건설사에 공급돼 약 3억원의 매출을 기록하는 등 업계에서 인정받고 있다.
또 연내 ‘바스’의 수출을 위해 영문버전을 개발하고, 넷구루라는 외국업체와 마케팅 협력관계를 맺었다. LG건설은 이와 함께 미국의 웹포와 협력을 추진해 내부에 적용 중인 협업시스템인 ‘e웍스21’을 오는 하반기부터 국내 건설업계뿐 아니라 미국시장에도 판매키로 했다.
LG건설의 김성진 IT기획팀 부장은 “자체개발 솔루션의 경쟁업체 공급은 e비즈니스 부가사업으로 수익성보다는 업계의 e전이를 고려하는 측면이 강하다”며 “하지만 이는 소극적인 전산 지원의 모습이 아니라 기업의 새로운 부가사업을 벌이겠다는 적극적인 자세”라고 말했다.
이밖에도 KT는 정보시스템사업본부 내에 솔루션 사업부를 신설, 통합고객정보시스템(ICIS)의 수출작업을 추진 중이다. 우리금융그룹 역시 내년 2월 개발 완료되는 한빛은행의 ‘신시스템’에 대한 수출전략을 수립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이처럼 공격적으로 전산실이 변할 수 있는 이유는 기업의 신IT문화 활성화에 따른 결과”라며 “자기 정체성을 찾는 과정이란 점에서 의미가 깊다”고 말했다.
<이병희기자 shake@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