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게임산업개발원 직원들은 요즘 몹시 바빴다.
가만히 있던 책상을 옮기며 때 아닌 이사를 하느라 비지땀을 흘려야 했다. 그렇다고 사무실을 다른 곳으로 이전한 것은 아니다. 팀별로 자리배치가 바뀌었고, 더러는 자리가 옆방으로 옮겨지기도 했다. 개발원이 출범한 지 3년만에 이른바 ‘리모델링’이라는 것을 단행한 것이다.
물론 리모델링이라고 요란한 인테리어를 다시 한 것은 아니다. 다만 책상 배치를 새롭게 하고 주위를 정리한 것에 불과하다. 그래도 다소 고요하던 개발원으로서는 한바탕 소동과도 같은 일이 벌어진 셈이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자리배치를 새로 하다 보니 무엇보다 그동안 직원들 서랍속이며 사무실 곳곳에 쌓여 있던 잡동사니들이 말끔히 없어지니 좋더라구요.”
지난달 10일 개발원에 입성한 정영수(51) 신임 원장. 그는 며칠간 묵묵히 업무 보고를 듣다 한마디 던졌다. “일단 자리부터 바꾸고 보자.”
출범 3주년을 앞둔 게임산업개발원은 요즘 정중동의 변화를 꾀하고 있다. 사무실 배치가 바뀐 것은 그 신호탄이다. 따지고 보면 변한 것은 책상 배치밖에 없지만 정 원장의 말대로 잡동사니가 사라졌고, 사무실은 이전보다 훨씬 말끔해졌다. 무엇보다 말끔해진 사무실 분위기가 직원들에게 일할 맛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은 아주 중대한 변화다.
“솔직히 게임은 문외한입니다. 80년대 후반 데이콤 행정전산망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하면서 8비트 컴퓨터로 ‘에그몬스터’라는 게임을 공무원들과 종종 즐기기는 했지만 특별히 게임에 흥미를 느끼지 못했습니다. 게임에 대한 인연을 굳이 찾자면 천리안 사업본부장 시절 ‘단군의 땅’이라는 텍스트 기반 머드게임을 천리안 콘텐츠로 채택할 것인가를 두고 고민했던 적이 있습니다.”
사실 정 원장이 신임 개발원장으로 거론되면서 일각에서는 “게임에 대해 전혀 모르는 사람이 국내 게임산업의 전초기지인 개발원 사령탑을 맡는 것은 문제가 있다”는 비판이 일었다. 정 원장이 개발원을 맡아달라는 제안에 오랫동안 고심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게임도 하나의 산업이고, 개발원의 역할이 산업으로서 게임을 붐업시키는 것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게임이 영화에 버금가는 고부가 문화산업이라는 것에 대해 이제 부인할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비록 분야는 달라도 게임도 결국 산업이고 산업 육성에 관한한 저 나름대로 25년 가량 쌓아온 노하우가 충분합니다.”
정 원장이 게임의 산업적 측면을 유독 강조하는 것은 자신의 이력과도 무관하지 않다. 데이콤 상무이사를 역임한 그는 우리나라 차세대 통신산업을 일으킨 주역 가운데 한 사람으로 꼽히기 때문이다.
그는 지난 93년 데이콤 천리안 사업본부장을 맡으면서 당시 ‘천리안’을 국내 최고 PC통신업체로 이끈 주인공이다. 지난 86년 국내 PC통신으로는 최초로 오픈한 천리안이 91년을 기점으로 후발주자인 하이텔에 가입자수로 선두자리를 추월당하는 위기에 내몰렸다. 정 원장이 천리안 사업본부장이라는 중책을 맡은 것도 바로 이때였다. 하지만 그는 과감한 조직개편과 신규 프로젝트를 소신껏 밀어붙이면서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저력을 발휘했다.
특히 그가 신규 프로젝트로 추진한 ‘윈도버전 PC통신’은 당시 텍스트 버전에 머물러 있던 경쟁업체들을 따돌리는데 결정적인 계기를 제공했다.
“많은 사람이 윈도버전의 성공 가능성에 대해 의구심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경쟁업체보다 많은 통신트래픽을 일으키기 위해서는 기존의 패러다임으로는 안된다는 소신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결국 2년 동안 준비한 극비 프로젝트가 공개되던 95년 천리안은 다시 선두로 올라섰습니다.”
당시 천리안 윈도버전은 장안의 화제였다. 아직도 많은 사람이 조선시대 한양도성을 형상화한 천리안 윈도버전 초기화면을 기억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천리안은 이를 계기로 95년 한해 매출이 370억원을 넘으며 처음으로 손익분기점을 넘기는 성과를 냈다. 90년대 후반 연 1600억원대 매출의 거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있었던 발판도 이때 만들어졌다. 그가 키운 천리안이 오늘날 인터넷시대를 연 하나의 씨앗과 같았다는 것을 감안하면 그가 국내 IT산업에 이바지한 공로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다.
비단 천리안 시절뿐만이 아니다. 그는 처음 사회에 진출할 때부터 격동하는 국내 IT산업의 현장에 서 있었다.
지난 78년 처음으로 입사한 곳이 당시 대기업 가운데 가장 온라인 마인드를 빨리 받아들인 제일제당이었고, 그는 여기서 당시 업계 최대 화두였던 사무자동화(OA) 교육을 담당했다.
86년 데이콤으로 자리로 옮긴 그는 또 한번의 기회를 잡았다. 당시 최대 IT 프로젝트로 꼽혔던 행정전산망 사업 현장에서 프로젝트 매니저로 활동한 것. 80년대 후반 국책사업으로 전개됐던 행정전산망 사업은 현재 세계적인 수준으로 평가되는 국내 IT 인프라의 근간이 됐다. ‘영원한 데이콤맨’으로 입지를 굳힌 것도 그가 이 사업에 참여하면서부터다.
그는 또 90년대에 들어서면서 데이콤이 전략적으로 추진한 국제전화사업부를 이끌며 ‘국제전화 002’의 시장점유율을 23% 수준까지 올려 놓았다. 이후 천리안 사업본부장을 거쳐 그는 또 한번 변신을 시도했다. 데이콤 경영계획실장을 역임했고 이어 대외협력실 이사, 상무이사 등을 거쳐 컨설팅업체를 창업, 경영자의 길을 걸었다. 꿈 많은 공학도로 출발한 그의 인생은 엔지니어에서 교육자로, 또 대형 프로젝트 기획자로, 사업 및 영업 전문가로, 경영자로 파란만장하게 펼쳐졌던 셈이다. 물론 그 변신의 한가운데는 국내 IT산업이라는 키워드가 자리잡고 있었다.
“데이콤과 게임산업 개발의 출발은 아주 유사한 것 같아요. 80년대 정부가 지분 50%를 출자해 데이콤을 출범시킨 배경에는 IT산업의 전초기지를 만들자는 취지였습니다. 이후 18여년이 흐른 뒤 정부가 세운 게임산업개발원 역시 취지는 비슷합니다. 게임산업의 육성을 위한 교두보로 삼겠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많은 용기를 얻고 있습니다. 게임은 잘 모르지만 산업을 육성하고 붐업시키는 것에 관한한 제 나름대로 경험이 풍부하니까요.”
다음달 2일이면 개발원은 3돌을 맞는다. 개발원의 3번째 생일은 여러모로 의미가 깊다. 사람으로 치면 걸음마 단계를 끝내고 이제 뛰기 시작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임 정 원장에게 거는 기대는 남다를 수밖에 없다.
“개발원은 출범 3년을 맞으면서 이젠 체계를 거의 갖췄습니다. 하지만 그동안 일을 벌리는데 급급했다면 이젠 성과를 생각해야 할 때라고 봅니다. 일을 위한 일을 지양하고 아무리 조그만 일이라도 성과를 생각하고 추진할 계획입니다. 개발원은 게임산업에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 역할을 해야 합니다.”
게임은 문외한이지만 산업을 붐업시키는 것에 관한한 일가견이 있다는 정 원장. 그가 그의 말대로 전환기에 접어든 국내 게임산업의 ‘불쏘시개’ 역할을 할 수 있을지, 업계 관계자들 기대가 그의 어깨에 달려 있다.
△78년 서강대 전자공학과 졸업 △78∼86년 제일제당 OA·FA총괄 △86∼91년 데이콤 행정정산망 PM △91∼93년 데이콤 국제전화사업부장 △93∼95년 데이콤 부가통신사업본부장 △91∼2000년 데이콤 상무이사 △2000∼2002년 메타비경영연구원 대표이사
<장지영기자 jyaj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