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적을 동지로.’
독자기술로 응용제품 시장 차별화에 주력해 온 비메모리반도체(시스템LSI)업체들이 기술제휴와 합작사 설립 등을 통해 한집살림에 나선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모토로라 등 그동안 ‘나만의 성’을 쌓고 후발 경쟁자들의 진입을 원천봉쇄하면서 공고한 리더십을 보여 온 이들이 합종연횡에 나선 이유는 뭘까.
비메모리업체들의 제휴목적은 크게 두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차세대 미세공정기술 개발과 생산능력의 확보다. 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이하의 미세회로 설계기술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회로간 간섭을 막을 수 있는 저유전(low-k)·고유전(high-k) 물질 개발은 물론, 각종 공정기술 개발도 수반돼야 한다. 또 300㎜ 웨이퍼를 가공할 수 있는 반도체 일관생산라인(FAB:팹)의 설립은 수십억달러 이상의 투자가 선행돼야 한다.
이 때문에 차세대 투자가 미진한 업체들은 내년부터 본격화될 300㎜ 웨이퍼 생산과 90㎚ 공정에 대응하기 위해 잇따라 기술 제휴 및 합작사 설립을 발표하고 있다.
세계 최다종의 비메모리 제품군을 확보, 반도체시장의 선두주자로 껑충 뛰어오른 ST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는 필립스·TSMC와 공동으로 300㎜ 웨이퍼 전용 팹을 건설하기로 하고 투자를 진행중이다. ST마이크로는 다소 늦은 차세대 투자를 따라잡기 위해서는 이미 이 분야에 대한 투자를 집중해 온 TSMC를 기술 및 생산거점으로 활용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판단을 내렸다. TSMC의 대주주인 필립스와 함께 합작사를 설립하기로 한 것도 그 때문이다.
인텔에 비해 차세대 공정 투자가 부족한 AMD가 UMC와 300㎜ 팹 합작사 ‘AU’를 건설하기로 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독자적인 기술개발과 투자에 대한 부담을 분산시키고 대만과 중국 등지로부터 아웃소싱을 확대하면 ‘가볍지만 예리하게’ 향후 시장을 공략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이들의 계산이다.
비메모리업체들의 또 다른 속셈은 고집적 시스템온칩(SoC) 개발에 있다.
SoC의 특성상 다종의 반도체 설계자산(IP)과 기술이 집적돼야 하는 상황에서 다른 IP를 가진 업체들과의 제휴는 특허 공유가 가능해져 비교적 손쉽게 라이선스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점이 크다. 여기에 공동 개발과 공동 판매까지 이어지면 경쟁구도를 완화시키고 시장 개척이 용이하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다.
최근 제휴를 발표한 도시바와 후지쯔가 SoC 개발을 위해 IP와 기술을 공유하기로 한 데 이어 히타치·미쓰비시가 아예 합병사를 설립해 차세대 SoC 개발 및 판매를 공동 진행하기로 한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인피니온·모토로라·아기어시스템스가 DSP 개발 합작사 ‘스타코어’를 설립하기로 한 것도 외형상으로는 선도업체인 TI의 독주에 제동을 걸기 위한 것으로 보이지만, 이들은 협력사를 통해 공동 개발한 IP를 차세대 SoC 개발에 활용한다는 계획아래 진행해 온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비메모리업체들간의 제휴가 ‘빅뱅 2라운드’의 주역으로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것은 전체 반도체시장의 80%를 차지하고 있는 이들이 대만·중국 등 아시아로 생산거점 이동을 본격화할 경우, 반도체시장은 말 그대로 ‘핵분열’에 휩싸일 것이라는 관측 때문이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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