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2년 11월 14일 미국 세계 WBA 타이틀전 매치 권투시합 도중 쓰러진 후 결국 다시 눈을 뜨지 못한 영원한 복서 김득구가 2002년 6월 우리 앞에 다시 나타났다. 비운의 복서가 아닌 진정한 챔피언이라는 이름을 달고….
곽경택 감독, 배우 유오성 등 친구 신화를 이뤘던 제작군단이 다시 만나 1년 동안 심혈을 기울인 영화 챔피언이 6월 28일 전국 극장에서 개봉된다. 26일 시네씨티에서 마련된 챔피언 영화시사회에는 전자신문사가 초청한 독자 300여명이 참석해 남들보다 먼저 김득구를 만났다.
지독한 가난과 어려움 속에서 물로 허기를 채우고, 날품팔이를 전전하다 78년 프로 권투선수의 길에 들어서 죽기 전까지 4년 동안 불꽃 같은 복서의 삶을 살았던 김득구. 극적인 삶을 소재로 한 만큼 이 영화는 결코 가볍지 않다. 간간이 터지는 웃음과 탄식소리 이외에 극장 안은 숙연함마저 느껴질 정도의 분위기가 120분 내내 이어졌다.
챔피언은 영화 친구와 엇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면서도 자극적인 오락성은 배제한 채 감동적인 휴먼드라마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하지만 이 영화는 김득구의 죽음을 애도하거나 관객의 눈물 샘을 자극하려는 의도는 거의 없다. 오히려 눈물이 나려고 할 즈음 밝은 색채의 화면으로 장면을 전환하는 등 감정에 치우치지 않으려는 절제된 미학을 느낄 수 있다.
시놉시스. 열악한 삶이지만 타오르는 태양과 끝없이 펼쳐진 짙푸른 바다를 보며 자란 소년 득구는 자신의 꿈을 키워간다. 7살 서울로 가는 버스에 무작정 몸을 실은 이 소년은 두 팔만 있으면 누구든 꿈을 이룰 수 있는 권투의 매력에 빠지고 반드시 챔피언이 되겠다는 결심으로 동아체육관에 입단한다.
권투에만 열중하던 득구는 어느날 위층 사무실에 이사온 경미를 보고 첫 눈에 반한다. 하늘에서 내려온 천사 같은 그녀는 이제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그만의 보물이다. 그녀를 잡기 위해 달리는 버스를 쫓아가고 그녀의 마음은 조금씩 열리게 된다. 이제 꿈을 위해, 사랑을 위해 그에게 남은 건 세계 챔피언뿐. 그는 사랑하는 그녀를 뒤로 한 채 이기고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 세계 챔피언 타이틀 시합을 위해 라스베이거스행 비행기에 몸을 싣는다.
이 영화는 2002년 축구가 한국의 희망이 되고 있듯이 권투가 한국의 희망이었던 70, 80년대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조악한 포장의 삼양라면, 심지에 불을 붙여야 하는 풍로, 빛 바랜 권투경기 포스터, 착 달라붙는 트레이닝복, 달동네 반 지하방 등 친구와 마찬가지로 이들 소품은 이미 어른이 된 영화 관객에게는 추억을, 신세대에게는 부담없는 과거로의 여행을 제공한다. 특히 가장 재미있고 신나는 부분은 김득구가 사랑하는 여인 경미의 관심을 끌기 위해 자기 이름이 쓰여진 트레이닝복을 입고 버스를 뒤쫓아 뛰는 장면. 이 장면에 삽입된 로버트 태권V 노래는 엄숙한 영화분위기를 일시에 경쾌하게 만들어주는 카타르시스 역할을 한다.
역시 압권인 것은 출연진의 연기력과 생생한 권투경기 장면. 김득구역을 맡은 유오성은 더 이상의 연기가 없을 만큼 완벽한 캐릭터를 소화해냈다. 눈빛과 몸짓 하나하나가 그 시대를 살았던 김득구의 영혼이 투영된 것 같은 빛나는 연기였다. 경미역의 신인배우 채민서의 연기도 자연스러웠으며 동아체육관 관장역을 맡았던 윤승원, 친구 복서였던 정두홍, 김병서도 자기 몫을 충분히 해냈다.
특히 이 영화에는 13번의 권투경기가 나온다. 그러나 권투경기마다 약간씩 다른 컨셉트를 갖고 있으며 모두 실제 경기보다 현장감이 더 생생하다. 역동적이고 액티브한 장면을 연출하기 위해 다양한 앵글을 집어 넣은 스타일리시한 방식을 기본으로 취하면서도 시선을 집중적으로 부각시킨 시선샷이나 김득구의 마지막 경기를 충실하게 표현하기 위해 다큐멘터리 방식을 병행, 각각 다른 맛을 내도록 했다.
곽경택 감독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이 영화는 불쌍하게 죽은 복서의 이야기를 그렸다기보다는 진정한 챔피언이 돼가는 집념의 복서를 통해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머릿속에 그 날의 경기 장면과 이후의 죽음이 선명하게 남아 있는 30대 이상의 관객에게는 묻어뒀던 그의 죽음을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하는 고통이 따를 수도 있다. 12세 관람가.
<조인혜기자 ihcho@etnews.co.kr>
◆영화보는 재미 2배
*카메오 출연=지금은 월드컵 경기중계로 유명한 송재익 캐스터가 권투 중계를 위해 출연했으며 곽경택 감독의 아버지가 김득구 선수의 금의환향을 반기는 고성군 군수로 등장한다.
*CG장면=미국 라스베이거스의 세계 타이틀전을 위해 필요한 관중 수는 8000명. 2000명의 보조출연자를 이용해 거대한 권투 세트장을 메우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컴퓨터그래픽을 이용하는 것. 이 장면 중 53커트가 CG로 제작됐지만 관객들은 어느 장면이 CG이고 어느 장면이 실사인지 구분할 수 없다.
*기억에 남는 김득구의 대사-“세상에 권투만큼 정직한 건 없어. 너, 팔 세 개 달린 사람봤어?”(그렇게 죽도록 얻어맞으면서 왜 권투를 하느냐는 친구의 물음에 대해)
“옷에 이름이 새겨져 있으면 대충할 수가 없거든요. 달리기를 해도 열심히 하게 되고….”(옷에 이름을 새긴 채 거리를 다니면 부끄럽지 않느냐는 연인 경미의 질문에 대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