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식의 다른 길 / 존 브룸필드 지음 / 박영준 옮김 / 양문 펴냄
“별이 빛나는 창공을 보고, 갈 수가 있고 또 가야만 하는 길의 지도를 읽을 수 있던 시대는 얼마나 행복했던가.”
루카치는 그의 명저 ‘소설의 이론’ 첫머리를 이렇게 시작한다. 지난 세기를 지배했던 서구문명에 대한 믿음은 균열을 겪고 있다. 과학기술에 대한 회의에서 세계화된 무소불위의 자본에 대한 저항에 이르기까지 여러 갈래의 목소리가 터져나오고 있지만 견고하게 버텨온 아성을 무너뜨릴 새로운 길찾기는 여전히 어렵기만 하다.
미국 미시간대학에서 20년간 인도사를 가르친 존 브룸필드가 쓴 ‘지식의 다른 길’은 ‘우리가 아는 지식이 과연 참인가’라는 도발적인 물음을 던진다. 저자의 말을 빌자면 ‘현대 산업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지적 패러다임만이 인류문명의 유일한 토대인가’라는 질문이다.
저자는 최근 대두된 문명위기론·신과학·양자역학·카오스이론 등에서 다뤄지는 새로운 세계에 대한 논의들을 통시적인 안목으로 살피고 있다. 다소 어렵게 읽히지만 저자가 던지는 근본적인 물음을 놓치지 않는다면 문명 비판서의 진수를 독파하는 즐거움은 클 것이다.
저자의 결론을 말한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또는 참이라고 믿고 있는 지식은 불과 수백년 전에 만들어진 기형적이고 왜곡된 것이다. 저자가 천착하는 문제 가운데 하나인 ‘시간’ 개념을 보자. 우리가 인식하고 있는 시간은 단선적이고 거칠다. 고대인에게 시간은 가득 찰 수도 있고, 텅 빌 수도 있는 것이다. 모두가 즐기는 축제의 시간은 은혜로운 것이었고 재앙이 뒤덮은 시간은 악의적인 것이었다.
과거·현재·미래의 경계가 정확히 구획하고 시간의 질적 차별성을 엄밀히 논하는 것은 근대 인식의 산물일 뿐이다. 서구 산업사회의 가장 큰 오류는 현재를 파괴하고 다가올 미래만을 진보나 발전으로 파악한 데 있다. 단선적인 시간 구성은 편협하고 제한된 것이어서 현재를 압박하고 근심과 불안, 긴장을 끊임없이 초래한다. 이렇게 보자면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성공 여부를 판가름하는 행위는 저울의 눈금으로 시간을 잴 수 있다는 오만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 책은 인류가 직면하고 있는 현재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체계 자체를 바꾸고 ‘다른 길’로 들어서야 한다는 위험한 주장을 하고 있다. 하지만 ‘다른 길’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면 그 곳으로 가자는 주장의 설득력은 반감될 것이다.
다행히 ‘지식의 다른 길’은 멀리 있지 않다. 새로운 지적 패러다임은 파편적이고 대립적인 문화를 지향하고 인간과 자연이 조화롭게 공생할 수 있는 인식론적 전환을 통해서 더 나은 삶의 가능성을 찾는 것이다. 고대의 토템이나, 뉴질랜드 마우리족의 풍습, 비 서구권의 각종 제례들이 전하는 삶의 방식은 분명 자연과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건강함을 품고 있다. 서구 중심의 획일적인 잣대를 내던지고 주목받지 못한 타자에게 눈을 돌린다면 파괴와 단절로 얼룩진 문명의 폐해들을 치유할 방법을 발견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이 제기하는 대안을 경도된 생태주의나 신비화된 오리엔털리즘으로 비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다른 길’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고 이 책은 실험실에서 나온 설득력 있는 가설 가운데 하나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식을 얻는 방식을 남에게 맡겨 도식화시키고 이렇게 얻은 것만을 지식의 전부인 것처럼 착각했다. 더 늦기 전에 굳어버린 사유의 암반을 뒤흔드는 근본적인 성찰의 계기를 갖는다면 이 책의 독자로서 소임을 다한 것이리라.
<정진욱 모닝365 사장 ceochung@morning365.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