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장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간다.’
얼마 전 천수이볜(陳水扁) 대만 총통은 수년 동안 미뤄 오던 TSMC·UMC 등 자국 반도체업체의 중국내 반도체 일관생산공장(FAB:팹) 설립을 허용했다. 물론 200㎜ 웨이퍼 공정 이하 등으로 제한 폭을 명시하긴 했지만 49년 분단 후 반세기가 넘도록 걸어잠갔던 빗장을 열어젖히기 시작한 것이다. 빠르게 변화하는 글로벌 경제환경에 발맞추기 위해서는 더 이상 정치이념만으로 반목과 대립을 지속할 수 없다는 것이 양국 정부의 입장인 것이다.
이처럼 언제까지 등을 돌리고 외면할 것 같았던 대만과 중국 사이에 화해의 움직임이 일자 전세계 반도체업계에 중화권 경계령이 내려졌다. 세계 최대의 전자·정보기술(IT)시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중국과 반도체·PC 등 최첨단의 기술력을 확보한 대만이 본격적인 협력구도에 들어간다면 미국·일본·유럽으로 3등분돼 온 세계 경제구도는 중화권이 포함된 아시아 위주로 새롭게 재편될 것이라는 위기감 때문이다.
이를 반영하듯 지난해 중국은 그동안 아시아시장 1위를 고수해 온 싱가포르를 제치고 110억달러의 시장규모로 아시아·태평양 반도체시장에서 1위로 뛰어올랐고 대만은 100억달러 규모로 그 뒤를 이었다. 또 양국의 선전에 힘입어 아·태 반도체시장은 430억달러로 1위인 미국을 바짝 뒤쫓았다. 반면 지난해 최악의 불황을 겪은 미국 반도체시장은 2000년에 비해 40%포인트나 하락해 450억달러에 그쳤다.
가트너데이터퀘스트는 최근 시장분석자료에서 중국 반도체시장 규모가 2006년 220억달러, 대만이 170억달러로 급성장할 것이라고 전망했다. 또 아·태시장 규모는 770억달러로 연평균 12.3%의 성장률을 보일 것으로 예상했다.
이같은 분홍빛 전망치는 미국·유럽 등지의 선두 전자·IT기업들이 설비투자력·원가경쟁력 등을 고려해 중국과 대만 등 아시아권에 주문자상표부착생산(OEM)·제조업자개발생산(ODM) 등 생산부문에서 아웃소싱을 강화하는 데서 비롯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세계 반도체업계가 중국과 대만의 움직임에 두려움을 느끼는 것은 이들이 단순한 하청공장에 머물지 않을 것이라는 데 있다. 정부와 기업이 합심해 과감한 투자는 물론, 최첨단 기술력과 우수인력을 확보하려는 공격적인 행보를 보이기 때문이다.
이미 대만 TSMC와 UMC는 90나노미터(1㎚는 10억분의 1m)급 미세공정기술을 확보, 텍사스인스트루먼츠(TI)·ST마이크로·필립스·AMD 등 세계 유수 반도체업체들의 아웃소싱 전략기지로 부상했고 대만의 반도체 생산능력은 2000년 5억8400만제곱웨이퍼인치로 4억3200만제곱웨이퍼인치인 한국을 완전히 따돌렸다. 또 반도체 설비투자액은 지난 2000년 105억달러, 지난해에는 56억달러를 대대적으로 투입, 내년이면 대만은 세계에서 300㎜ 전용 공장을 가장 많이 가진 국가가 된다.
중국도 만만치 않다. 화홍NEC·SMIC·GSMC는 0.18미크론(1㎛은 100만분의 1m)급의 미세공정기술을 갖추고 팹을 가동하기 시작했고 대만 TSMC와 UMC, ASE는 중국 상하이 등지에 짓기로 한 200㎜ 팹을 이번 분기에 착공한다. 또한 미국·일본·한국 등 선진 반도체국가의 구조조정으로 발생한 유휴인력들을 모두 중국시장에 끌어들이고 있다.
대만과 중국은 더 이상 가깝고도 먼 나라가 아니다. 시장이 있으면 어디든 가야 하는 자본주의의 냉혹한 원칙은 양국을 공존공생하는 형제국으로 바꿔 반도체시장의 역사를 다시 쓰게 할 것으로 보인다.
<정지연기자 jyjung@etnews.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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