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반도체업체들은 현재 고민에 빠져 있다. 10년 이상 계속된 경기 침체, 사상 최악의 반도체 불황, 무섭게 추격해오는 동아시아 국가들. D램 시장의 주도권은 한국으로 넘어간 지 이미 오래다. 메모리 사업을 축소하고 비메모리산업을 육성하려던 정책 또한 아직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다.
지난해 비메모리업계 ‘톱20’에는 8개사의 일본 업체가 포함됐다. 그러나 정작 시장점유율면에서는 8개 업체를 모두 합쳐도 1위 인텔의 시장점유율을 따라잡지 못한다. 순위면에서도 일본 업체들의 대부분은 2000년에 비해 한두 단계씩 내려앉았다. 1년 사이에 일본 업체들은 세계 유수업체간의 경쟁에서도 그만큼 뒤처졌다는 예기다.
자존심이 상할대로 상한 일본의 반도체업계는 과거의 영예를 되찾기 위해 돌파구를 모색중이다. 방법은 합종연횡. 기술의 우월성만을 믿고 독자 플레이를 고집해왔던 일본 반도체업체들이 자국내 경쟁업체들과 손을 잡기 시작한 것이다.
NEC·도시바·후지쯔·히타치·미쓰비시 등 5개사는 차세대 반도체 공정기술 표준화 연구를 공동으로 수행하기 위해 이달말에 신생회사를 설립한다. 그동안 경쟁관계에 있던 다섯 회사가 힘을 모아 로봇·게임·자동차 등에 사용되는 첨단 반도체 제품을 만들기로 의기투합한 것.
반도체산업 부흥의 필요성을 절감한 일본 정부도 이에 가세하고 나섰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NEC 연구개발센터를 구입, 이들 연합체에 제공하기 위해 총 315억엔의 예산을 투입하기로 했다. 비메모리 분야에서만큼은 기업들과 정부가 한 몸이 돼 세계 중심으로 서겠다는 야심찬 구상이다.
이와는 별도로 지난 4월에는 히타치와 미쓰비시가 시스템LSI 사업동맹을 선언했다. 두 회사는 내년 합병회사를 설립, 개발·제조는 물론 판매망을 하나로 묶는 방안을 구상중이다. 이에 뒤질세라 최근에는 후지쯔와 도시바가 시스템LSI 분야에서 광범위하게 협력하기로 하고 9월말까지 세부 제휴사항을 확정키로 하는 등 또다른 동맹을 선언했다. 이들 회사는 각각 비교우위에 있는 이미지 프로세싱 소프트웨어와 고속 신호처리 기술의 통합으로 시너지 효과를 창출한다는 계획이다.
작년 세계 반도체 시장 규모는 1553억달러. 이 중 미국(450억달러) 다음으로 큰 일본시장(364억달러)에서 일본의 반도체 자급률은 69.5%에 달한다. 이점은 일본이 조금만 분발한다면 얼마든지 성공할 수 있다는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일본 반도체업체들과 정부가 합종연횡으로 반도체 부흥을 모색하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다자간 동맹이 현실화할 경우 향후 일년 내에 일본의 반도체업계는 도시바와 후지쯔, 히타치와 미쓰비시, 독자생존에 나선 NEC 등 3개 그룹으로 재편된다. 또 5개 업체가 기술적으로 공조할 수 있는 이 경우 중복투자 방지, 개발비용 절감 및 시간 단축, 업체간 과당경쟁 해소 등의 막대한 시너지 효과 창출은 당연한 결과다. 일본 반도체업계의 지각변동은 이미 시작됐으며, 이것이 일본 반도체산업의 르네상스로 이어질지는 더 두고볼 일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