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만히 있으면 꼴찌.’
반도체업계에서는 ‘가만히 있으면 중간은 간다’는 옛말이 절대 통하지 않는다. 모험수를 두어서라도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곳이 바로 반도체산업계의 특징이다.
반도체 지도를 놓고 볼 때 어느 한곳도 변화를 시도하지 않는 곳이 없다.
반도체 종주국인 미국은 반도체산업 육성의 국가적 프로젝트를 기반으로 업체간 활발한 합종연횡을 시도하고 있다.
미국으로부터 반도체산업의 주도권을 넘겨받았던 일본 역시 비메모리 강국을 꿈꾸며 NEC·도시바·후지쯔·히타치·미쓰비시 등 5대 메이저업체들이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한 짝짓기에 들어갔다.
유럽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독일의 인피니온테크놀로지는 대만업체와 300㎜ 사업제휴에 나서는가 하면 필립스·지멘스·ST마이크로 등이 포기할 사업은 재빨리 포기하고 육성할 사업은 육성하는 ‘선택과 집중’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심지어는 영원한 후발국으로 남을 것으로 선진국들이 평가절하해 온 대만의 반도체업체들까지도 일본·유럽국가의 반도체업체들과 손잡기에 사활을 걸고 있고 21세기 반도체산업의 핵으로 부상할 중국시장에 앞다퉈 진출하고 있다.
중국도 마찬가지다. 베이징·상하이·쑤저우 등지에 대단위 반도체 공단을 건설하고 세계 유수의 반도체업체들에 추파를 던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적극적인 변화의 노력 없이 시장상황이 좋아지기만을 기다린다면 자멸을 면하기 어렵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반도체산업의 현주소는 어디일까.
우리나라는 메모리산업 세계 1위, 박막트랜지스터 액정표시장치(TFT LCD) 산업 세계 1위 등 어깨에 힘이 들어갈 만큼의 번듯한 명함을 여럿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작 반도체산업의 면모를 요모조모 살펴보면 그리 내세울 것이 없다.
지난해 기준으로 메모리에 비해 산업규모가 3.5배나 큰 시스템LSI 산업부문에서 세계 20위권 안에 든 우리나라 기업은 삼성전자 단 한곳에 불과하다. 미국 기업이 8개, 일본이 8개, 유럽국가가 3개인 데 비하면 아직 멀었다는 것이 정확한 평가다.
시장점유율 면에서 50%대의 미국, 20%대의 일본, 10%대의 유럽국가 등에 비해 고작 2%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반도체 기업이 특정 부문에서 세계시장을 좌지우지할 만큼의 역량을 갖춘 것은 사실이지만 반도체산업 전체를 놓고 보면 여전히 소년기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해외 유수의 반도체기업들이 반도체 특허 공유, 중복투자 방지, 개발비용 절감, 개발기간 단축, 과당경쟁 해소 등의 차원에서 시너지 효과 창출을 기반으로 동침할 경쟁업체 찾기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우리니라 반도체업계의 분위기는 사뭇 다르다.
합종연횡을 대세로 받아들이고 있는 경쟁국들의 반도체업계와는 달리 국내업체들 만큼은 꿋꿋하게 독자생존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나라 대표 반도체기업인 삼성전자는 ‘시장에 맞는 제품을 개발하기보다는 가능성 있는 제품 개발로 시장을 창출한다’는 내용의 성공 가능한 포트폴리오 전략으로 독자노선을 고집하고 있다.
다른 반도체기업들도 하이닉스가 도태되면 뭔가 새로운 시장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감만 키운 채 준비다운 준비를 하지 못했다.
삼성전자·하이닉스·동부전자·아남전자 등은 여윳돈만 확보되면 향후 시장점유력 확대를 위해 과감한(?) 설비투자를 하겠다는 식의 안이한 방안만을 내놓고 있다.
100여개에 달하는 국내 비메모리반도체 개발업계에서는 한때 동종업체끼리 모여 대기업 대상의 아웃소싱사업을 확대하거나 공동개발을 추진,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겠다는 바람이 불기도 했으나 수년째 결실 없는 답보상태를 거듭하고 있다.
가트너코리아 김창수 이사는 이같은 현상에 대해 “한국기업들이 새로운 전략을 짜지 않는다면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 있다”며 “현 상태가 계속된다면 후발국인 대만에 추월당하는 불명예를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우리나라는 반도체 대국의 꿈을 접어야 할 정도로 여건이 열악한 나라는 아니다. 반도체산업의 인프라 측면을 고려할 때 우리나라는 해외 선진국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는다는 것이 업계 전문가들의 견해다.
박종섭 하이닉스 전임 사장은 “반도체 제조공장을 중심으로 한두시간 거리의 반경 안에서 1만명의 엔지니어를 확보할 수 있는 지리적 요건을 갖춘 나라는 우리나라가 대표적이며 올해 초 마이크론테크놀로지가 하이닉스 인수에 강한 의욕을 보였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지리적·산업적·인적·물적 인프라 측면에서 우리나라는 매우 유리한 입장에 서 있다. 세계 최대시장으로 급부상중인 중국과는 항공편으로 두세시간 거리에 있다.
반도체 생산량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공정미세화기술도 세계 최고 수준이다. 대기업과 벤처기업을 합한 업체수에서도 경쟁국에 비해 전혀 손색이 없다. 지적재산권의 근거가 되는 반도체 관련 특허출원 및 획득면에서도 세계 수준을 기록하고 있다.
다만 ‘뭉쳐야 산다’는 대세 불변의 진실을 잠시 잊고 있을 뿐이다. 지금이야말로 겸허한 자세로 주변을 둘러봐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