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보통신 관련 표준화 활동에서 민간단체와 기업의 역할이 커지는 것은 우리나라만의 일이 아니다. 시장 및 기술 지배력을 바탕으로 구성된 85개 사실표준화기구가 국제표준을 좌지우지하고 있다.
TTA가 98년부터 2001년까지 채택한 표준 중 50%는 ITU, ISO 등 공식표준기구의 표준이었으나 2001년 그 비중이 25%로 대폭 줄었다. 표1참조
◇왜 민간인가=표준제정에서 민간의 역할이 점차 커지는 이유는 공식기구의 절차가 정보통신기술의 발전속도를 따라가지 못하기 때문이다. 표준화 제정 이전에 시장에서 이미 승부가 판가름날 정도로 흐름이 빠른 IT산업에서 개발초기단계부터 각 사업자들이 자유롭게 모여 만든 표준안이 사실상의 표준이 되고 있다.
정부가 표준화정책을 민간 중심으로 바꾸는 것도 또다른 이유다. 정부는 민간중심의 표준안 활성화를 위해 올해까지 30개의 민간포럼을 육성하고 포럼별로 연간 2000만∼3000만원 가량의 운영자금으로 지원사격을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공식적인 의결절차보다 시장의 선택이 중요시되는 게 가장 큰 이유다. 전세계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는 IT산업의 본질적 특성과 맞물려 표준을 쥐는 자가 곧 시장을 쥐게 됐다.
이에 따라 영향력 있는 업체들이 참여하는 사실표준화기구의 표준이 시장을 장악하고 국가, 지역, 국제공식표준기구가 이 표준을 따르는 역전현상이 나타났다.
정우기 LG텔레콤 부장은 “최종의사결정은 공식표준기구가 담당하나 강자들이 주도하는 포럼에서 실질적인 작업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보는 게 맞다”고 말했다.
◇기업들의 움직임=표준전쟁에 뛰어든 각 업체들은 국내는 물론 국제회의에 참석, 영향력을 발휘하는 한편 자체 표준을 시장에 내놓아 지배력을 강화하고 있다.
KT는 매년 50여회의 세계 표준회의에 담당연구원을 보내 50여건의 기술기고문을 발표하며 사실상의 표준화기구인 각종 포럼 30여곳에 빼놓지 않고 참가하고 있다. KT는 특히 통신망 부문의 절대적인 지위를 기반으로 해마다 20여건의 자체표준(KTS)을 제정해 국내 업계가 따르도록 했다. KT는 TTA단체표준 중 ATM기술에 관련된 100여건의 표준이 KT의 제안대로 채택될 정도의 막대한 영향력을 바탕으로 매년 20여건의 KTS안을 TTA에 제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여러 건의 세계표준을 확보한 삼성전자는 표준화를 위한 전담팀을 구성하고 인원을 200명까지 늘려 IMT2000 등 차세대 이동통신 분야의 세계표준 확보에 대한 전력을 강화했으며 LG텔레콤도 각 연구진이 ITU 등 국제공식표준화기구는 물론 기술 선도업체들이 결성해 사실상의 표준제정을 이끌고 있는 국제포럼에 참가해 IMT2000, CDMA 등 표준화과정에 적극 참여하고 있다.
◇과제=표준화 주도권이 정부에서 민간으로 옮겨가는 과정에서 정확한 역할분담이 요구된다. 표준제정 절차나 주체의 의미가 사라지고 실제 영향력 중심의 사실표준이 적용되는 비즈니스 환경에서 정부의 명확한 선긋기가 필요하다는 것이 관계자들의 지적이다. 정통부와 SK텔레콤이 무선인터넷표준을 놓고 최근 벌인 신경전은 표준의 효력에 대한 입장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이런 상황을 막기 위해서는 명확한 분담이 필수라는 분석이다.
기업들의 적극적인 참여도 요구된다. 국내의 경우 표준화 주축은 민간으로 옮겨졌지만 재정적인 독립은 아직 이루지 못했다. 대부분 업체들이 무관심하기 때문이다. 삼성, LG, KT, SKT 등 대기업을 제외한 나머지 업체들은 표준개발에 대한 투자나 적극적 회의 참여가 미비한 상황이다. ‘전쟁’이라고 부를 만큼 표준의 중요성이 커지고 이해관계가 다양해지는 가운데 표준에 대한 명확한 상황인식이 필요하다.
<신화수기자 hssh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