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64)치우천왕

 이번 월드컵에서 우리의 마지막 경기였던 3·4위전이 끝난 후 축구대표선수들은 센터서클에 빙 둘러서서 인사를 했다.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그동안 열렬한 성원과 뜨거운 환호를 보내준 붉은 악마에 대한 감사의 표시였다.

 붉은 악마.

 국내적으로는 온 국민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했고, 국제적으로는 한민족의 에너지를 유감없이 떨친 붉은 악마의 응원은 충격이었다. 시청 앞 광장과 광화문 네거리를 가득 메우고도 남아 종로 쪽과 서대문 쪽으로 길게 늘어서 펼쳐진 붉은 악마의 함성은 곧 힘이었다. ‘대∼한민국’을 소리 높여 외치고 양손을 하늘을 향해 펼치는 순간 모아지는 기(氣)는 승리의 조건이었다.

 승리의 감동과 한민족의 하나된 기쁨을 함께 나눈 붉은 악마, 그 열광의 현장에는 늘 붉은 깃발이 등장했다. 치우천왕(蚩尤天王). 뿔 장식의 도깨비 형상으로, 고대 신화에 등장하는 치우를 그린 깃발이다.

 치우는 중국 민족이 자신들의 시조라고 받드는 황제(黃帝)와 세계의 주도권을 놓고 전쟁을 벌인 신이다. 산둥성 일대에 거주하던 신족(神族)의 우두머리로, 구리로 된 머리에 쇠로 된 이마를 하고 뿔이 있으며 각종 무기를 만드는 기술이 뛰어나고 용맹한 것으로 표현되고 있다.

 신화에는 중국인의 시조 황제가 치우로 대표되는 이민족을 제압한 것으로 그려지고 있지만, 치우가 워낙 용맹했기 때문에 중국 역사에서도 전쟁의 신, 군신(軍神)으로 추앙돼 큰 전쟁을 앞두고 제사를 지내는 신으로 받들어졌다. 한편으로, 우리나라 상고사를 연구하는 재야 사학자들은 치우를 한민족의 선조로 보기도 하는데, 정신 또는 사상사의 관점에서 바라볼 때 각종 도깨비 문양 중에 치우를 본딴 그림이 많은 것은 우리 민족문화와 어떠한 형태로든 밀착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한다.

 그렇다면 왜 붉은 악마는 치우천왕을 깃발로 채택했을까.

 치우는 힘센 반역이다. 우주의 최고 지배자로 인식되어 온 중국의 황제와 싸워 승승장구했던 힘센 반역이다. 중심에 중국이 있고 그 주변에 동이, 서융, 남만, 북적의 오랑캐들이 있다는 화이(華夷)적 문화로 볼 때 치우는 분명한 변방의 대항문화(counter culture)였으며, 빛깔 또한 남방과 불을 나타내는 붉은색이다. 반대로 치우를 주변국의 시각으로 보면 영웅이다. 자신들을 구속하는 기준에 대한 도전이며, 극복을 위한 투사다. 따라서 붉은 악마 응원단이 내세우는 치우천왕은 중국측 시각이 아니라 한족(漢族)과 싸워 이긴 배달나라의 힘센 영웅으로, 축구의 중심에 대한 반역이며 역전을 위한 징표였다.

 반역이라 함은 어느 것이 중심이 되고 기준이 되는가에 따라 상대적이다. 우리가 기준이 되면 치우천왕이 반역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준이면 역전이란 말도 성립되지 않는다. 우리가 기준이 되지 못했고, 우리가 중심이 되지 못했기 때문에 치우천왕의 이미지는 반역과 악마의 이미지로 존재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번 월드컵 응원에서 수많은 인파가 흔든 붉은 치우천왕의 깃발을 바라보면서 부담스럽지 않았다. 옛날 기왓장에 나타나는 도깨비가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듯 펄럭이는 치우천왕의 깃발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것은 이미 우리의 몸 속에는 치우천왕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사실의 확인이기도 했다.

 그 치우의 피는 우리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우리민족의 혼에 반역과 함께 역전을 노리는 피로 존재하고 있었다. 약소민족이 거대한 중국, 중심이 된 중국을 극복하기 위해 거센 반역과 역전을 도모하기 위한 에너지로 잠재되어 있었다. 그 힘이 이번 월드컵을 통해 형상화되었고, 민족의 혼에 치우천왕의 그 뜨겁고 열정적인 에너지가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우리 스스로도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일상의 거대한 반란이었으며, 강력한 에너지였다. 기존 세계 질서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역사를 창조할 수 있는 힘이 우리의 가슴속에 흐르고 있다는 것을 구체적으로 확인한 제의였다.

 더욱 중요한 사실은 붉은 악마가 이끌어낸 치우천왕의 에너지는 부정적 에너지가 아니었다는 것이다. 철저한 낙관과 자긍심에 바탕을 둔 긍정적 에너지였다. 반역이라는 개념과는 전혀 다른, 모두가 승리자가 되는 에너지였다. 그동안의 음울한 패배주의를 말끔히 씻어내고 우리민족 모두에게 새로운 자신감을 불어넣기에 충분한 에너지였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확인할 수 있었다. 우리가 기준이고, 우리가 중심이 되는 사회, 통합하고 조율할 수 있는 사회를 우리가 만들어갈 수 있다는 자신감이었다. 반역이 아니라 제압이고, 역전이 아니라 수성이고, 도전이 아닌 응전의 세상을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가 우리에게 왔음을 느끼고 확인할 수 있었다. 때문에 우리는 그렇게 열심히 뛰었고, 그렇게 열심히 응원을 펼쳤던 것이다.

 이번 월드컵을 통해 우리는 여러개의 기준을 만들었다. 월드컵 4강. 아시아 축구의 기준이 되었다. 분명한 기준이다. 이 기준에 대해 중국에서 배앓이를 하는 것이 곧 반역이고 역전을 바라는 생각이며, 행위다. 붉은 악마의 응원에서도 우리는 세계 기준을 만들었다. 자발적이고 역동적인 응원과, 응원이 끝난 후 색종이 조각까지 쓸어담아 청소하는 응원질서에 세계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또한 정보기술(IT)분야에서도 기준을 만들었다. IT월드컵에 걸맞게 세계 최초로 시연한 IMT2000 서비스, 디지털방송, 무선인터넷 등, 세상 어느 곳에도 접할 수 없는 정보통신 환경을 제공했다. 하물며 이동전화의 벨소리까지도 외국인들에게는 놀라움의 대상이었고 기준이 되었다.

 여기서, IT사업은 단순하게 세계 기준이 된 것이 아니었다. 붉은 악마들이 집과 사무실을 떠나 광장으로 모여들 수 있었던 것에는 여러가지 요인들이 있었겠지만, 이동전화의 역할도 매우 컸다. 불안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집과 사무실을 떠나 있어도 언제든 링크되어 있다는 생각이 붉은 악마들을 광장으로 모여들게 한 하나의 바탕이 되었다.

한편으로 붉은 악마들이 광장으로 나설 수 있게 한 개인용 통신매체는 이미 IT강국을 위한 게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승리의 조건이었다. 그것은 세계에서 그 전례가 없는 IT사업에 대한 국민들의 강력한 응원이었으며, 붉은 악마의 응원보다도 더 전폭적인 성원이었다. 분명한 것은 정보통신사업에서 이용자들의 그 성원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가 부르짖고 있는 IT강국이라는 말은 존재하지 못했을 것이다.

 월드컵은 끝났다. 하지만, IT월드컵은 이제부터 시작이다. 축구대표선수들이 경기가 끝나고 엎드려 감사의 절을 했듯이, 정보통신사업자들도 붉은 악마보다 더 큰 성원을 보내준 이용자들에게 진정으로 감사하는 마음으로 절을 올리고 이제 본격적인 게임을 시작할 때다. 치우천왕의 힘, 반역의 힘이 아니라 제압의 힘이 될 수 있게 하는 도구가 곧 우리의 IT사업임을 인식하고 게임을 지배하기 위해 뛰고 또 뛰어야 할 때다.

 우리가 세계 기준이 되고 세계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열심히 뛰는 방법밖에 없다는 것을 행복한 6월에 우리 자신을 통해 확인할 수 있어 더욱 행복했다. 6월이여 영원하라.

작가 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