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제16대 대통령 링컨은 미국은 물론 전세계적으로 유명한 인물이다. 그의 성장과정과 정치역정, 대통령직을 수행하면서 치른 남북전쟁, 노예해방 그리고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국민의 정부는 지상에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라는 불멸의 명언과 갑작스런 그의 죽음은 현재까지도 많은 사람들에게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또한 링컨은 그 어느 누구보다도 전신을 이용한 통신에 많은 관심을 갖고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남북전쟁에서 승리한 대통령으로 평가받고 있다.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어나 학교교육을 거의 받지 못한 링컨은 독학으로 변호사가 되었고, 일리노이주 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었다. 이어 연방 하원의원으로 당선되었고, 공화당 대통령 후보로 지명받아 선거에 나섰다. 1860년 미국 대통령선거는 남부의 운명을 건 중대사건으로, 링컨의 대통령 당선은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북부와 공화당의 승리이며, 남부가 우세할 수 있는 기회를 영원히 상실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이를 계기로 남부의 7개주(앨라배마·플로리다·조지아·루이지애나·미시시피·사우스캐롤라이나·텍사스)는 연방으로부터 이탈을 결의하고 1861년 2월 미국남부연합을 조직했다. 이에 대해 링컨은 어느 주도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할 권리는 없다고 하여 남부 7개주의 이탈을 인정하지 않았다.
1861년 3월 4일. 링컨은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내 최고의 목적은 연방을 유지하여 이를 구제하는 것이지, 노예제도의 문제는 아니다’라고 주장했지만, 남부연합군은 4월 섬터 요새에 대한 공격을 감행해 마침내 남북전쟁이 시작되었다. 연방정부에서 사우스캐롤라이나의 수도 찰스턴 항구에 있는 섬터 요새에 식량을 보내려 하자 남부연합은 연방측의 지원을 차단하고 남부에서 연방군을 몰아내기 위한 방안으로 섬터 요새를 포격, 공격을 시작했던 것이다.
미국 남북전쟁의 원인은 매우 복잡하고 그 배경도 광범위하다. 그러나 전쟁의 직접적인 동기는 주(州)가 연방으로부터 분리·탈퇴한다는 것이 헌법에서 인정되고 있는가의 여부에 관한 헌법해석의 문제였다. 이밖에 이 문제를 유발시킨 노예제도 시비, 그리고 이와 관련된 동서남북 각 지역간의 이해대립 등 실로 많은 문제가 얽혀 남부와 북부는 이미 극복할 수 없는 갈등에 의해 전쟁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남군의 공격에 링컨은 남부의 해상봉쇄를 명령하고 7만5000명의 지원병을 모집하기 위해 연방에 속한 각 주로 명령을 하달했다. 전신을 통해서였다. 링컨의 지원병 요청을 받은 각 주에서는 즉시 모병이 이뤄졌고, 지원병들이 모여들었다. 그 와중에 전신은 폭주상태에 빠졌다. 요청한 병력 지원에 대한 보고와, 지원하는 병사들이 친지들에게 보내는 안부 전보로 폭주상태에 빠졌던 것이다.
4월 18일. 연방정부는 워싱턴의 ‘아메리칸전신’ 사무실을 접수하고 남부로 연결된 모든 전신선을 절단해버렸다. 남부에서도 군용 통신망을 위주로 전신사가 활용되었다. 4월 21일. 전신선 연결을 위한 남북의 협상이 이뤄졌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대신 남북 각각의 전신선으로는 모병을 하고 보급품을 주문하는 내용의 전신이 빠르게 타전되고 있었다.
연방군을 총지휘하던 링컨은 전쟁중에 ‘전쟁성’ 전신국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전투가 벌어지는 전선의 보고를 초조하게 기다렸고, 상황에 따라 예하 장군들에게 전신을 통해 직접 작전명령을 하달했다. 링컨은 때로 전신국에서 밤을 새웠고, 그곳에서 일하는 전신원들에게 그들의 별명을 불러 친근감을 표시하곤 했다.
당시 미국 전역에 설치되어 있던 전신망을 운영하던 전신원들은 남북전쟁중 남군과 북군의 구분 없이 영웅적인 수훈을 세웠다. 각 군의 운명은 사령관의 메시지 전달에 달려 있지만, 때로는 선발대와 함께 나아간 전신원의 손끝에 달려 있었고, 전신원들이 적군의 통신선에서 도청한 정보에 의해 전투의 승패가 결판나기도 했다.
또한 전신원들은 무장도 하지 않고 말도 타지 않은 채 전투에 참여하여 일반 병사들보다 훨씬 큰 위험 속에서 일해야 했다. 그들은 포탄이 눈앞에서 터지는 전투의 와중에서 메시지를 타전해야 했고, 메시지를 전해야 했다. 깔아놓은 전신선이 소총탄에 맞아 끊어질 정도로 전투가 벌어지는 가까운 곳에까지 전신선이 설치되었고, 그만큼 위험의 정도도 컸다.
전쟁중 남부군의 전신은 전선과 보급품의 부족, 수리공이 모자라 효율적으로 활용되지 못했다. 하지만 북군의 통신망은 매우 효율적으로 전쟁에 활용되었다. 특히, 대통령이었던 링컨이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북군이 전신을 남군에 비해 더 적극적으로 활용했다는 것은 기록으로도 나타난다. 북군은 200명에 이르는 통신관련자가 전사하거나 부상당했고 적군의 포로가 되었지만, 남군은 51명뿐이었다. 또한 남군의 통신선은 모두 4000마일(6437㎞)이 조금 넘었는 데 비해 북군 관할 아래 있던 통신선은 모두 1만5300마일(2만4623㎞)이 넘었다.
한편으로, 남북전쟁 수행중 전신용 암호가 처음으로 쓰이기 시작했다. 때문에 전신원이 포로가 되면 즉각 새로운 암호가 채택되었다. 흥미로운 것은 당시 암호 중 여자의 이름은 시간을 뜻하는 것이었다.
링컨은 전신국에서 주요 메시지가 전신기를 통해 전해질 때마다 전신원의 어깨 너머로 전신의 내용을 한자 한자 읽어보기도 했다. 북군과 링컨의 이러한 전신선에 대한 활용과 관심, 가치인식이 남북전쟁에서 북군이 승리할 수 있었던 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각축을 벌이던 남군과 북군은 1864년 5월 북군 총사령관 그랜트 장군의 대공세를 통해 마무리되었다. 서부전선에서는 셔먼 장군 지휘 아래의 북군이 채터누가에서 애틀랜타로 전진, 포위작전과 우회작전을 전개하여 9월 3일 애틀랜타를 점령하였다. 이어 12월 20일 마침내 해안도시 서배너를 함락시켰다. 이것이 이른바 셔먼 장군의 ‘대행진’이라는 작전이다. 이 때 셔먼이 링컨에게 전보를 쳐서 서배너의 도시를 크리스마스 선물로 전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셔먼이 북상하여 그랜트의 공세를 돕고, 동부전선에서는 그랜트가 남군의 주력을 섬멸하기 위한 공세를 개시했다. 5월 5일의 윌더니스 전투로 시작하여 약 1개월 동안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전투를 계속한 끝에 남군의 전선은 무너졌다.
치열한 전투를 벌이면서도 북군 사령관과 아름다운 우정을 나눈 남군의 사령관 리는 책임을 완수하기 위해 북군 사령관 그랜트에게 편지를 보내 회견을 요청했다. 1865년 4월 9일 애퍼매턱스 코트하우스에서 양군의 최고사령관인 그랜트와 리의 회견이 이뤄졌고, 4월 12일 남군은 정식으로 항복했다.
전쟁을 승리로 이끈 링컨은 관대한 조치를 베풀어 남부의 연방 조기 복귀를 바랐으나, 남군 항복 2일 후인 4월 14일 워싱턴의 포드 극장에서 연극 관람중 남부인 배우 J 부스에게 피격당해 이튿날 아침 사망했다. 링컨의 저격 사실은 그날 저녁까지 외부로 전해지지 않았다. 안보를 위한 보안조치로, 저격당한 순간부터 워싱턴과 연결된 모든 전신선이 차단되었기 때문이다. 링컨은 죽어서도 전신과 깊은 연관을 맺은 대통령이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