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에서 산업디자인학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철현 원장(45)은 요즘 학원의 존폐를 심각하게 고민중이다. 이전보다 수강생이 절반 이하로 떨어졌을 뿐 아니라 경쟁이 치열해졌기 때문이다. 돈보다는 교육사업에 뜻이 있어 강사 생활을 시작으로 학원계에 입문한 이 원장은 학원의 명맥이라고 잇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지만 기본 운영비도 나오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 무작정 학원을 붙잡고 있기에는 너무 힘들다고 하소연한다. 그렇다고 다른 학원처럼 수강생을 전문으로 모집하는 영업 브로커를 쓰자니 교육자의 양심이 허락하지 않는다고 토로한다. 한때는 고급 정보기술(IT) 인력을 양성하고 국가 정보화의 일익을 담당한다는 자부심도 있었지만 이제는 다 흘러간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이처럼 사설 IT학원이 벼랑끝으로 몰리고 있다. 정규 교육과정에서 배울 수 없는 실무기술을 제공하고 실전에서 바로 투입할 수 있는 전문인력을 양성, IT산업의 부흥을 이끄는데 일조했던 IT학원이 하나 둘씩 사라지고 있다. 인터넷 붐과 IT산업 호황에 힘입어 지난 99년과 2000년에 폭발적으로 증가했던 IT학원은 지난해부터 매월 소리 소문 없이 두세 군데씩 문을 닫을 정도로 어려움에 봉착하고 있다. 그나마 남아 있는 학원도 언제 문을 닫을지 모를 지경이다.
국내 IT학원의 기원은 지난 70년대 중반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PC나 노트북이라는 말조차 생소한 시절 정규교육과정에서 배울 수 없었던 컴퓨터 기본교육에서 도스 등 기본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컴퓨터 학원이 그 시초다. 이후 80년대 워드프로세스, 정보처리 등 자격증 위주의 학원이 번창하기 시작했으며 90년대를 거치면서 IT학원은 크게 컴퓨터학원·정보처리학원·산업디자인학원 등으로 분화, 발전해 왔다. 이중 컴퓨터학원은 일반 PC사용법에서 기본 프로그램 등 이제 막 컴퓨터를 배우는 사람을 대상으로 그리고 정보처리학원은 주로 자격증과 마이크로소프트(MS), 오라클, 시스코 등 IT업계를 주름잡는 글로벌기업의 시스템 관리와 운용 능력을 가르친다. 또 인터넷 붐과 맞물려 우후죽순처럼 생겨난 산업디자인학원은 웹마스터· 웹디자인 등 주로 인터넷과 관련한 고급 실무기술 위주로 커리큘럼이 세분화돼 있다.
하지만 지금은 서로의 영역이 모호해져 이 같은 구분이 무의미한 상황이다. IT학원 중 가장 심각한 곳은 일반 컴퓨터학원이다. 지난해부터 구조조정이 가속화돼 한때 1만개에서 지금은 7000여개 정도로 3000개나 줄었다. 컴퓨터 대중화로 굳이 학원을 찾아 교육을 받을 필요가 없게 된 데다 정부에서 무료로 주부 인터넷교실 등을 운영하고 대부분의 학교나 구청에서도 비슷한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해 인기가 시들해졌기 때문이다. 앞으로도 컴퓨터학원은 비중은 크게 줄어들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보고 있다.
전문프로그래머 교육이나 오라클, MS 등 자격증 교육을 위주로 하는 정보처리학원 역시 교육장을 축소하거나 지방 분원으로 철수하는 사례가 크게 늘고 있다. 이는 대기업 특히 시스템통합(SI)업체 계열의 IT학원이나 대학 IT교육센터, 직업전문학교 등의 등장으로 입지가 크게 좁아진 것도 한몫한다. 일각에서는 대기업의 교육사업 진출이 시장을 넓혔다고 긍정적으로도 보지만 시장 질서를 어지럽혔다는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30년 넘게 학원을 운영해 온 정상은 회장은 “대기업의 교육사업이 IT학원의 교육 수준을 높이기보다는 쓸 데 없는 외양에 치중하고 무리하게 강사를 스카우트해 과당경쟁을 촉발하는 원인이 됐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여기에 정통부와 노동부에서 실업자 등의 재취업을 돕기 위해 IT교육비를 최대 50%까지 지원했는데 이것이 학원의 수입 기반을 무너뜨리는 부작용을 초래하기도 했다. 학원은 정통부나 노동부로부터 지원비를 얼마나 따오느냐가 사업 성패의 관건이 되었고, 이 과정에서 IT학원이 뒤처지게 되었다는 분석이다. 즉 브랜드나 시설 좋은 대기업 계열 학원이나 신뢰감을 주는 대학 IT교육센터에 수강생이 몰리는 결과가 만연했다. 이밖에 학생들의 수준이 높아지면서 기존 커리큘럼이 학생들을 유인하지 못하는 것도 학원이 어려움을 겪는 주요한 요인 가운데 하나다.
이처럼 총체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 사설 IT학원들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서 전문가들은 우선 교육 과정의 차별화가 있어야 된다고 지적한다. 즉 현장교육, 소수정예 교육, 특화교육 등으로 경쟁에서 이길 수 있는 자신만의 무기를 갖춰야 한다는 것이다. 소수정예만 뽑고 현장실습 등 강도 높은 교육을 통해 대기업 계열 학원과 차별화에 성공한 비트컴퓨터가 좋은 예다. 또 소프트뱅크 교육원도 시스코에 특화된 교육프로그램으로 다른 학원과 비교할 수 없는 명성을 쌓고 있다. 엑스뉴스웹아트스쿨도 산업디자인학원이라는 두루뭉실한 교육과정 대신에 플래시 위주의 커리큘럼으로 승부해 이 분야에서는 상당한 인지도를 얻고 있다.
최원길 엑스뉴스웹아트스쿨 원장은 “이전처럼 취업을 목적으로 학원 문을 두드리는 사람도 많지만 웬 만한 기초과정은 모두 습득한 준 전문인력이 대부분”이라며 “학원 역시 이같은 수요에 맞춰 일부 과정을 특화하거나 전문화하는 쪽으로 생존방법을 모색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공동 수강제도 역시 하나의 대안이다. 현재 대부분의 학원 교육프로그램은 수강자가 많지 않아 폐강률이 높다. 높은 폐강률은 다시 학생들을 멀어지게 하는 악순환으로 이어지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비슷한 교육프로그램이라면 몇몇 학원이 모여서 공동 수강제를 두는 것도 한가지 방안이라는 의견이다.
여기에 정부에서도 IT학원을 전문인력을 양성하기 위한 대표 채널로 인식하고 대기업이나 대학 부설 IT센터와 구분되는 정책을 마련해야 한다고 학원 관계자들은 입을 모은다. 대기업, 대학 IT교육센터, 전문학원은 사업 운영방법이나 설립 기반이 다르기 때문에 이들을 모두 묶어 한꺼번에 지원하기는 무리라고 지적했다. 기초과정이나 아주 고급과정은 대기업이나 대학 부설학원에 맡기더라도 IT학원을 위한 특화과정을 구분하는 식의 정책적 배려가 필요하다고 학원 관계자들은 말하고 있다.
<강병준기자 bjkang@etnews.co.kr 김인진기자 iji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