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PC산업을 부흥시키기 위해서는 미국과 일본의 브랜드 메이저나 대만의 ODM 메이저 중 어느 한쪽의 벽을 반드시 뛰어넘어야 하는 실정이다.
“현재로는 어느쪽도 결코 쉽지 않습니다. 브랜드 메이저와 대만 메이저들은 이미 각자의 강점에 따라 일정한 아성을 쌓아 놓고 서로가 협력하는 모델을 구축해 놓았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기는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격입니다.” 모 업체 관계자의 실토다.
미국 기업들은 PC사업에서 △강력한 브랜드 파워 △최고의 기술력 △글로벌 유통채널 △글로벌 유통망 △마케팅 경험 등을 강점으로 최대한 활용하고 있다. 일본 업체들 또한 △미국 메이저에 뒤지지 않는 브랜드 파워 △기술과 상품의 창조력 △고도의 품질관리력 △글로벌 마케팅 경험 등을 무기로 삼고 있다. 이들은 자신의 약점인 △높은 생산비용을 보완하기 위해 아웃소싱에 의존하고 있다.
국내 업체들의 PC생산량은 세계 데스크톱PC의 8.1%, 노트북PC의 6.6%다. 이 정도의 물량으로 브랜드력을 확보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다. 반면 대만 업체들은 세계 데스크톱PC의 25.7%, 노트북PC의 57.7%에 달한다. 이 데이터로 볼 때 브랜드로 승부를 걸기에 승산이 있는 쪽은 오히려 한국이 아니라 대만이다. 그러나 에이서 등 한때 세계 PC브랜드를 장악했던 대만은 과감히 브랜드를 포기했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결국 한국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브랜드보다는 아웃소싱으로 귀결된다. 세계 PC 아웃소싱의 절대적인 강자로 군림하는 대만의 강점은 무엇일까.
대만이 한국에 비해 우월한 고유한 강점은 유연성이다. 물론 대만은 △대량생산 △구매파워에서 나오는 저렴한 제조원가 △우수한 부품 인프라 △신속한 개발력 등이 최대 강점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같은 강점은 ODM을 통한 규모의 경제를 이룩한 결과다. 이 결과를 낳을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유연성이다. 한국의 부품 인프라는 대만에 못지 않다. 한국과 대만의 부품경쟁력을 보면 원가의 45%를 차지하고 있는 메모리, 하드디스크드라이브, CD롬, 모니터 등에서 대만에 비해 우세하다. 한국이 대만에 비해 열세한 부분은 PCB, 파워서플라이 등 일반부품과 주기판 등이다. 한국도 대량생산만 가능하다면 대만에 비해 결코 불리하지 않다는 뜻이다. 그러나 개발력이 있는 대기업들은 유연성이 떨어지고 유연성이 있는 중소업계는 개발력이 처지는 게 한국의 현실이다.
“우리가 ODM으로 사업을 전환한 것은 국내 업계에는 커다란 충격이었습니다. 세계화를 외쳐대던 때에 이름없는 아웃소싱을 하겠다는 발상은 일종의 패배로 받아들이는 분위기였습니다.” PC사업을 ODM방식으로 대전환을 모색했던 김종은 사장의 후일담이다. LG전자의 황운광 부사장은 “국내 대기업의 개발력은 대만에 비해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지금은 우리쪽이 앞선 부분도 많습니다.” 최근 IBM과 대량 공급계약을 성사시킨 황 부사장은 개발력에도 자신감을 나타낸다. 문제는 발상의 전환이라는 것이다.
“미국과 일본 메이저들은 PC관련 부품에서 최강자로 떠오르고 있는 한국이 PC에서마저 강자로 부상하는 것을 매우 경계하고 있습니다. 그만큼 브랜드사업이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국내, 특히 대기업에서는 아웃소싱에 대한 천시풍조가 강합니다. 더불어 고위 경영층이 고부가가치사업과 저부가PC사업을 동일한 잣대로 평가하는 것도 직원들의 사기를 떨어뜨리고 있습니다.” 이름을 밝히기 꺼려 하는 모 관계자는 국내기업들이 현실을 냉정히 받아들이고 유연성있게 그에 걸맞은 육성전략을 찾아야 할 때라고 강조했다.
<유형준기자 hjyoo@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