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68)전신원 카네기(하)

 인쇄된 부호가 아닌 소리를 통해 전신을 수행할 수 있는 방식은 매우 획기적인 기술이었다. 빠르고 쉽게 통신을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기술에 숙달되는 것은 매우 힘든 일이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피츠버그 전신국으로 카네기를 구경하러 오곤 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피츠버그시 주변으로 큰 홍수가 났을 때 카네기의 진가는 더욱 빛을 발했다. 홍수가 난 지역의 전신과 교통이 침수로 인해 두절되자 도시는 고립되었고, 전신국에서는 카네기를 홍수현장으로 파견하여 응급처리를 수행하게 했다. 카네기는 배에 싣고 온 전보를 받아 그것을 동부에 전신으로 전송하는 방식으로 서부와 동부간의 전신 교류를 계속했다. 홍수가 난 야외에서 인자통신이 아니라 소리를 통해 전신을 주고받을 수 있다는 것은 매우 효율적인 방법이었다.

 카네기의 이러한 능력은 도시 전체로 알려졌고, 그것이 인연이 되어 피츠버그로 되돌아 왔을 때 또 다른 기회가 마련되었다. 철도 전문가 스콧과의 만남이었다. 스콧은 철도사업에 대해 천재라 불리는 전문가로, 펜실베이니아 철도의 피츠버그 관리국장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스콧은 애리조나의 관리 담당 총 책임자에게 전보를 보내기 위해 주야로 종종 전신국을 방문했고, 그때마다 카네기와 대면하는 사이였다.

 카네기는 어느날 스콧 밑에 근무하는 사람으로부터 스콧이 자신을 서기 겸 전신원으로 일하도록 주선할 의향을 비쳤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카네기는 기뻤다. 사무실에만 있는 생활을 떠나서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는 기회라고 여겨졌기 때문이다.

 카네기는 함께 일할 수 있음을 전달했고, 그 결과 스콧의 서기 겸 전신원으로 1853년 2월 1일에 취직했다. 월급이 25달러에서 35달러로 높아졌다. 상상도 하지 못했던 높은 급여였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는 당시 건설중이던 자체 전신선이 완성될 때까지 일반 사무에 지장이 없는 범위 내에서 피츠버그 전신국의 전신회선을 임시로 사용해 각 역의 기차를 통제하고 있었다. 카네기는 전신에 관련된 그 일을 담당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의 전신을 담당하면서도 카네기는 단순한 전신원으로 근무하지 않았다. 피츠버그 철도를 총괄하고 있던 스콧의 지령을 전보로 알려주면서도 단순기술자가 아니라 전보내용을 통해 스콧의 철도 운영에 대한 기술을 배우고자 관심있게 살펴보았다. 관심과 무관심의 차이는 무척이나 크게 나타났고, 그 차이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아 곧바로 확인되었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근무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철길에서 큰 사고가 발생했다. 모든 열차가 지연되고, 철도는 엉망이 되었다. 각 역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의를 전신을 통해 쉴 새 없이 물어왔다. 책임자 스콧은 부재중. 그대로 둘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누군가가 모든 책임을 지고 철도 운행을 지령해야 할 형편이었다. 그것은 매우 위험한 일로, 잘못되면 직장에서 파면을 당하게 될 것이고, 법의 문책을 당하게 되는 사항이다. 카네기는 그 일을 자신이 수행하기로 마음먹었다. 어차피 전신으로 지령되기 때문에 자신이 한 일인지 스콧이 한 일인지 받는 사람들은 알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카네기는 그동안 스콧의 지령에 따라 자신이 보냈던 전신내용을 기억해내고 열차의 통제를 시작했다. 동부로 가는 급행열차를 먼저 보내고, 이어 차례대로 대기중인 기차에 대해 운행지령을 전신을 통해 내렸다. 철도는 차츰차츰 정상화되었다. 그때 스콧이 사무실로 들어섰다. 사고가 생겨 모든 열차가 지연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서둘러 사무소로 들어선 것이었다.

 카네기는 스콧에게 연락이 되지 않아 자신이 열차의 운행을 지령했다고 밝혔다. 아무 허락도 받지 않고 열차를 통제한 것에 대한 질책도 예상했지만, 그 반대였다. 열차는 정상적으로 운영되었고 당연히 스콧 자신이 지령한 것으로 되어 카네기가 지령했다는 것은 아무 흔적이 없는 비밀이 되었다.

 이후 스콧은 카네기에게 열차의 운행을 지령하는 일을 일임했다. 전신과 기차의 통제를 동시에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카네기, 그는 그 철도국에서도 최고의 능력자가 되었다.

 카네기는 전신을 통해 맺은 철도와의 인연으로 기차에 처음으로 침대차를 도입한 우드럼 침대차 회사에 투자, 많은 이득을 올리게 되었다. 이후 발발한 남북전쟁중에는 워싱턴으로 불려가 전쟁 초기 남부군에 의해 파괴된 전신선로와 철도를 보수하고 관리하는 일을 담당하게 되는 인연으로까지 이어졌다.

 이어 카네기는 나무 다리를 강철로 대체하는 교량건설회사에 자금을 투자, 막대한 이익을 보았다. 그리고 그 강철과의 인연은 또 다른 인연으로 이어져 피츠버그에 있는 작은 철공소의 동업자가 되어 철강사업과 인연을 맺게 되었다.

 1865년 철도회사를 사직하고 본격적으로 철강업에 손을 대기 시작한 카네기는 훔스티드 제강공장을 건설했고, 그 뒤 피츠버그 제강공장을 중심으로 석탄, 철광석, 철도 및 선박을 비롯한 운송업 분야를 엮는 거대한 철강 트러스트(독점적 기업활동)를 형성했다. 1892년 설립된 카네기 철강회사는 1901년에 이르러 철강의 생산부터 판매에 이르는 전공정을 포괄하는 미국의 가장 큰 철강회사로 성장했다.

 철강왕으로 엄청난 부를 쌓은 카네기는 만년에 자신이 모은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 차원에서 교육과 문화사업에 전념했다. 뉴욕 최대의 공연장인 카네기홀에 출자했으며, 카네기 공과대학을 설립하는 데 거액을 기부했고, 카네기 재단을 설립해 연구와 문화사업을 지원했다. 1919년 수억달러의 재산을 사회에 환원한 카네기는 84세의 나이로 생애를 마감했다.

 철강왕 카네기.

 카네기가 전신원 출신이었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다. 보통사람과 다른 시각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 중요한 사항이다. 그는 어디서든 주어진 환경을 긍정했다. 단 50센트의 돈에도 감사했다. 그러면서 늘 새로운 것에 대한 도전욕구에 불타 있었다. 그것은 학습이었다. 인자전신도 잘 하지 못하던 때 소리를 이용한 음향전신방식을 익힐 수 있었던 것도 배움에 대한 뜨거운 욕구와 긍정적인 사고의 결과였다.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과 기회에 대해 철저하게 긍정하고 또 다른 사다리를 오르기 위해 끝없이 학습했던 카네기. 남들과 다른 카네기의 그 시각이 세계 최고의 부자로, 또 그 돈을 가장 멋지게 쓴 사람으로 기억하게 하는 것이다. 펜실베이니아 철도회사에 근무할 당시 카네기는 한 유명인사의 집을 방문하게 되었다. 카네기는 그 집에서 대리석에 새겨진 글귀 하나를 보고 감격했다.

 “논쟁하지 못하는 자는 어리석은 자다. 논쟁하지 않는 사람은 편협하고 비굴한 자다. 논쟁할 용기가 없는 자는 노예다.”

 그 글귀는 카네기가 생전에 설립한 2500개의 도서관 중 일부인 뉴욕과 스키보의 도서관에 걸렸다. 카네기는 주변환경에 대한 긍정과 함께 그 누구보다도 활발하게 논쟁을 벌인 인물이기도 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