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 싸움구경처럼 재미있는 일도 드물다.
사람의 심보란 고약한 면이 있어서 이웃집 부부싸움이든 다른 나라에서 전쟁이 터지든 자기만 다치지 않으면 은근히 싸움자체를 즐기는 속성이 있다. 단지 오락을 위해서 만만한 상대를 골라 일부러 싸움을 붙이는 경우도 흔하다. 닭이나 개, 소끼리 싸움을 붙이는 도박문화가 지역을 불문하고 역사적 뿌리가 깊은 것도 이 때문이다. 심지어 동물의 왕국같은 TV 프로그램에서 흔히 나오는 포식장면도 시청자들에겐 가학적이고 재미난 구경거리로 시청률을 유지하는 핵심적 역할을 하고 있다. 전쟁을 자주 치르던 로마인들은 원형경기장에 짐승 대신 죄수들을 몰아넣고 서로 죽이는 검투사경기를 즐겼다. 세월이 많이 흘렀지만 오늘날도 권력자들은 정치적 위기가 오면 대중의 공격성향을 잠재워 줄 검투사, 희생양을 찾는다. 미국발 경제불안에 대한 위기감이 고조되는 가운데 이라크 침공시기를 분주히 저울질하는 부시 정권을 보며 옛 로마제국이 연상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일까.
최근 영국, 미국에선 로봇이 검투사처럼 싸우는 이벤트 경기가 폭발적 인기를 끌고 있다. 영국 BBC가 지난 97년 시작한 로봇워(Robot War) 대회는 현재 세계 17개국에 무려 2000만명이 넘는 시청자층을 확보한 초대형 로봇이벤트로 발전했다. 로봇워에 참가하는 로봇들은 마치 중세 기사처럼 다양한 무기로 중무장한 것이 특색이다. 도끼, 회전톱 심지어 화염방사기까지 장착한 기괴한 형태의 싸움로봇들이 부딪치는 경기장면은 그 자체로 매우 강력한 오락적 요소를 제공한다. 로봇워의 흥행비결은 현대인에 잠재된 공격성향을 첨단기술로 포장해 부추겼기 때문이다.
회전톱이 상대편 로봇철판을 찢고 들어가 전선과 연료관을 잘라버린다. 연료가 피처럼 흘러나오고 로봇은 불까지 붙어 모터와 부품 타는 냄새가 코를 찌른다. 경기장 주위에선 관중이 철창을 잡고 열광한다. 영락없이 옛날 콜로세움에서 열리던 검투사경기의 하이테크 버전이다.
이러한 로봇전투경기는 사이버공간을 무대로 하는 오락게임보다 한층 더 강렬한 파괴본능을 자극하며 갈수록 강력한 무기를 탑재한 로봇전사들의 격투에 세계인들은 매료되고 있다.
오는 10월이면 우리나라에서도 로봇전투대회 ‘로봇워 코리아 2002’가 열린다. 총 19개 대학팀이 출전하는 이번 로봇전투대회에 국내 로봇마니아들은 잔뜩 기대하는 눈치지만 대중적 인기몰이에도 성공할지 여부는 아직 불투명하다. 본시 파괴적인 재미는 더 강한 폭력상황이 있을 경우 상쇄되게 마련이다. 미국, 영국에서 로봇싸움 따위에 사람들이 열광하는 것은 그만큼 그들의 사회구조가 성숙하고 안정화됐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물론 우리나라도 화염병과 돌멩이, 최루탄연기로 뒤덮인 암울한 시기는 벗어났다. 그러나 아직도 폭력적 갈등요인이 넘치는 한국사회에서 터프한 검투사 로봇들의 액션연기가 얼마나 인기를 끌지 두고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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