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계좌에 대한 은행권의 이중적인 행태가 빈축을 사고 있다. 신규 전자금융서비스를 확대할 때는 서로 무분별하게 비칠 만큼 경쟁적으로 가상계좌를 도입하다가도, 공적(敵)을 만나면 담합으로 똘똘 뭉쳐 가상계좌를 반대하고 나서 비은행권과 잦은 마찰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에 따라 앞으로 더욱 확산될 전자금융시대에 대비하기 위해서는 은행권의 이중잣대를 막을 만한 공통된 원칙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6일 금융계에 따르면 최근 부산은행·새마을금고가 도입한 가상계좌 방식의 신용카드 전표수납 업무를 비씨카드가 일방적으로 중단시킨 뒤 양측의 팽팽한 대립은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본지 7월 19일자 8면 참조
새마을금고는 비씨카드를 공정거래위원회에 제소, 법적인 수단에 호소하고 있지만 부산은행을 제외한 비씨카드 회원 은행들이 모두 강경한 입장이어서 양측의 자율협상이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비씨카드 회원들은 운영위원회를 열고, 새마을금고가 공정위 제소를 취하하면 한발 물러날 수 있다고 통보했으나 금고측은 신뢰할 만한 약속이행 방안이 없다며 맞서고 있다. 이에 대해 공정위 또한 신용카드 전표 수납대행 업무를 회원은행으로만 제한한 현행 비씨카드의 업무관행까지 전면 조사한다는 입장이지만 근본적으로 가상계좌를 둘러싼 시각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다.
양측의 공방이 지리한 싸움으로 이어지자 전문가들은 이번 기회에 가상계좌의 허용범위나 경쟁원리를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각종 전자금융서비스가 속속 출현하는 요즘 가상계좌를 둘러싼 은행권과 비은행권의 대립이 더욱 불거지는 양상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 초 국민은행과 조흥은행 등 7개 은행은 하나은행과 삼성카드가 도입한 가상계좌 방식의 자동화기기(CD·ATM) 서비스도 중단하면서 극한 대립으로 치달았고, 공정위로부터 불공정거래 심결을 받았으나 현재까지 소송이 진행중이다.
특히 은행들은 지난 수년간 2, 3금융권과 비제도권 금융기관, 통신사업자들과 제휴, 저마다 가상계좌 기반의 전자금융 서비스에 경쟁적으로 뛰어들었다. 무통장입금, e메일뱅킹, 개인대개인(P2P) 자금이체, 휴대폰 전자지갑 등이 대표적인 사례다. 여기에다 하반기에 들어서면서 국민·신한·기업·농협·제일은행이 B2B 결제용 시스템에 잇따라 가상계좌를 채용하고 온라인경매·주택청약·대학원서접수 등 각종 부가서비스에도 확산되는 분위기다.
이처럼 엇갈린 행보는 가상계좌가 전자금융서비스의 효과적인 수단인 반면, 동시에 은행들의 강점인 ‘실계좌’를 위협하는 요인으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금융결제원 김시홍 연구역은 “가상계좌가 다양한 부가서비스를 창출하고 고객에게 혜택을 줄 수 있지만 반대로 이동전화사업자 등이 은행의 전통적인 지급결제 업무를 잠식할 수도 있다”고 평가했다. 가상계좌를 둘러싼 은행의 고민이 바로 여기에서 비롯되고 있는 셈이다. 신한은행 관계자도 “이미 보편화된 가상계좌를 어디는 막고 어디는 푼다는 게 말이 안된다”면서 “은행들의 집단행동에 문제가 있는 게 사실”이라고 실토했다.
이에 따라 재경부·금감위·한은 등 정책당국과 상당수 전문가들은 가상계좌서비스를 기본적으로 자율경쟁 원리에 맡기되, 허용범위나 사업자 요건 등 최소한의 공통된 기준은 필요하다는 시각이다.
<서한기자 hseo@etnews.co.kr>
<용어설명>
△가상계좌=모계좌(실계좌)에 달려있는 수많은 자계좌를 일컫는다. 고객별로 인식번호가 부여돼 있어 사용자 입장에서는 큰 차이가 없다. 가상계좌의 입출금도 실제 입출금으로 본다. 일례로 e메일 송금의 경우 e메일 계정에 가상계좌가 연결돼 있고, 이는 다시 은행 실계좌에 연동된다. 이용자들이 e메일 주소를 계좌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은 이런 이유다. 이때 e메일 송금 업체는 은행과 약정을 맺고 1개의 실계좌를 개설한 뒤 회원수만큼 필요한 가상계좌를 부여받아 서비스를 제공한다. 가상계좌는 고객들이 계좌정보를 누출할 염려없이 인터넷·휴대폰 등 다양한 채널을 활용할 수 있는 이점이 있다. 은행도 다수 제휴사업자를 통해 가상계좌를 보급하면 자연스럽게 실계좌 잔액이 올라가고, 다양한 신규서비스를 만들어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