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기기산업의 펀더멘털인 인쇄회로기판(PCB)산업이 세계경기의 ‘더블 딥(double deep) 현상’으로 홍역을 치르고 있다.
한국정보통신산업협회의 통계에 따르면 PCB업체들은 지난 2001년 전년 대비 약 24% 감소한 1조4900억원 어치를 생산하는 데 그쳐 탄탄한 성장 가도에 급브레이크가 걸렸다. 게다가 올 들어 정보통신기술 등 전방산업의 부진이 지속돼 매출 신장에 커다란 어려움을 겪고 있다.
그러나 업체들은 불경기보다 더 두려운 대상으로 중국을 지목하고 있다. PCB 생산량 측면에서 중국은 미국·일본·대만에 이어 세계 4위 수준으로 저인건비와 규모의 경제를 통한 저가정책으로 국내 업체들의 입지를 급속히 좁혀 들어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중국 PCB산업은 대만·홍콩·일본·미국 등 외국계 투자업체들이 중국 생산량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외형상으로만 중국내에서 PCB를 생산하는 것이지 사실은 미국 산미나, 대만 난야·컴팩, 일본 CMK·이비덴 등 외국계 선진 PCB업체들이 세계시장을 장악하기 위한 ‘별들의 전쟁’을 치르고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더욱이 이들 외국계 중국 업체는 다층인쇄회로기판(MLB) 제품을 주력 품목으로 생산, 전체 생산량의 70% 이상을 차지하고 있으며 이 품목 중 80% 가량을 해외 시장에 수출함으로써 이들 업체와의 매출 확대를 위한 치열한 가격경쟁으로 국내 업체들은 곤혹스러운 입장이다.
업체의 한 관계자는 “선진 PCB업체와 세트업체의 생산기지 이전으로 중국 제품의 품질도 크게 향상되기 시작했으며 특히 중국 현지 업체들은 최근의 세계 수요 부진을 극복하기 위해 무차별적 저가공세를 펼치고 있어 경영에 큰 타격을 주고 있다”고 말했다.
그렇지만 우리나라 PCB산업의 미래가 비관적인 것만은 결코 아니다. 우리나라 수출의 약 80%를 10개 안팎의 업체가 주도할 정도로 주전 선수층이 얇긴 하지만 40여년의 관록을 가진 만큼 축적된 기술력과 노하우로 중국 등의 업체와 대등한 시장경쟁을 벌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실제 중소업체를 제외한 삼성전기·대덕전자·심텍·이수페타시스 등 10대 대형 및 중견 업체들은 고부가 제품을 통해 차이나패닉 현상을 극복하는 데 자신감을 보이고 있다. 한 관계자는 “비록 저부가 제품에서는 밀리더라도 빌드업(build up)기판 등 고부가·고기술 제품에서는 품질이 앞서 있어 일부 품목에 집중하는 특화전략으로 시장경쟁력에서 우위에 설 수 있다”고 말했다.
또 일부 업체들은 ‘세계의 공장’으로 부상하는 중국시장 진출을 적극 도모하고 있다. 오래가지 않아 양·단면과 6층 이하의 MLB를 중국 업체들이 장악할 것으로 판단하고 중국 업체가 넘보지 못하는 고다층 기판의 생산기지를 이전, 원가경쟁력을 탄탄하게 갖춰 고부가 시장을 선점하겠다는 포석이다.
이와 함께 전자기기의 소형화·경량화·고부가화·박형화 등 추세에 대응하기 위해 업체들은 고밀도 빌드업 기판·볼그레이드어레이(BGA)·플립칩(flip chip)·임베디드 PCB·칩스케일패키지(CSP)·다층연성 PCB 등 차세대 제품군으로 사업 영역을 넓혀가고 있다.
따라서 PCB업체들이 지금의 난국을 선택과 집중을 통한 사업고도화 전략으로 타개한다면 지난 수십년간 지켜온 한국 수출산업 역군의 자존심을 계속 이어갈 수 있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진단이다.
<안수민기자 sm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