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초 한 IT업체가 월드컵을 겨냥해 새로운 형태의 게임기를 개발했다. 하지만 이 게임기는 등급심의에서 몇 차례의 보류판정을 받은 끝에 월드컵 기간 중인 지난 6월에야 등급을 받아 시중에 내놓을 수가 있었다. 월드컵 특수를 기대했던 이 회사의 계획은 모두 무산돼 버렸고 겨우 그동안 생산해 놓은 제품을 처분하는 데 만족해야 했다.
이 회사는 그 사이에 여러 경로를 통해 영상물등급위원회에 사정도 해보고 불만도 토로했다. 이 과정에서 담당자는 참으로 쇼킹한 말을 들어야 했다.
출장심의를 나온 영등위 직원에게 부족한 부분을 한꺼번에 지적해주면 될 것을 왜 심의를 받을 때마다 새로운 이유를 들어 보류판정을 내리느냐고 묻자 그 직원이 “우리도 장사를 해야할 거 아니냐”는 어이없는 답변을 하더라는 것이다.
물론 영등위 직원이 실수로 한 발언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무의식적으로 이런 말들이 나왔다는 것은 영등위가 기업들을 돈벌이 대상으로 여기고 있음을 보여주는 편린이라는 점에서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할 수 있는 것은 영등위의 예산불건전성에서 나온다. 영등위는 법으로 민간단체로 규정돼 있다. 하지만 예산을 스스로 조달하는 능력이 없다. 예산을 전적으로 정부보조금이나 심의를 받는 업체들이 내는 심의료에 의존하고 있는 것.
영등위의 결산자료를 보면 극명하게 드러난다. 지난해 영등위 수입금을 보면 국고 7억3500만원, 공익 자금 7억4100만원, 자체 자금 23억6200만원이다. 자체 자금은 이월금 등이 포함돼 있지만 업체들이 내는 심의료가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특히 자체 자금의 경우 지난 99년부터 영등위가 세워놓은 예산을 초과해 거둬들이고 있으며 국고보다도 늘어나고 있는 추세다.
이렇다 보니 영등위는 법규정과는 달리 스스로 모순을 안게 됐다. 즉 업체들이 돈을 내고 자신들의 작품을 심의받는 이상한 모양이 된 것.
이와 관련해 업계의 한 관계자는 “기업들이 영등위의 운영비를 대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불만이 많은데 영등위가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기업들을 압박하고 발목을 잡아가면서까지 돈을 뜯어가고 있는 현실은 모순이 아닐 수 없다”고 토로했다.
실제로 영등위의 심의료는 꽤 비싼 편이다. 미디어 형태별로 다르기는 하지만 영화와 비디오의 경우는 최고 10분당 15만원까지 받고 있으며 게임물의 경우도 DVD로 제작된 외산게임의 경우 1매에 50만원까지 받는다. 출장심의시에는 지역에 따라 50만∼90만원의 출장비를 추가로 지불해야 한다. 따라서 보류판정을 받아 재심의를 할 경우에는 등급분류를 받는데 소요되는 비용이 크게 늘어난다. 또 간단한 보드게임 위조로 서비스하고 있는 온라인 게임 사이트의 경우 수십 종의 게임에 대해 일일이 심의를 받아야 하기 때문에 심의비용도 장난이 아니다.
더구나 보류판정을 받아 재심의를 받아야 하는 경우에는 제품 출시 시기나 서비스 시기가 늦어지기 때문에 이로 인한 기업의 손해도 만만치 않다. 이는 영등위가 기업들에 있어 항상 ‘갑’의 입장에 설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하지만 기업들이 불만에 쌓여 있는 원인이기도 하다.
결과적으로 영등위가 어떻게 예산의 건전성을 확보하느냐가 아주 중요하다. 그래야만 업체들의 불만이 적어지기 때문이다.
<김순기기자 soonkkim@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