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출연연구소가 존재하는 이유는 과학기술 개발에 있어 국가가 담당해야 할 몫을 담당하는 주체로서 그리고 대학이나 민간 기업들이 담당하기 어려운 분야를 대신해서 연구개발하는 등 한 나라의 기술력을 한단계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다.
현재 출연연은 이러한 기본적 역할을 제대로 수행하고 있을까.
‘대학=기초연구, 출연연=응용연구, 기업체=개발 및 상품화 연구’
대학과 출연연 그리고 기업으로 이뤄지는 3개의 연구 주체가 이상적으로 연구 개발하는 활동 영역을 분담하고 있을 때를 말해주는 등식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이들 3개 연구주체간 연구개발 영역에 대한 경계가 사라지면서 대학은 기초연구뿐만 아니라 응용 및 개발 연구에 많은 부분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출연연도 본래의 영역인 응용연구보다는 기업체가 해야할 개발 연구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같이 연구주체간 경계가 허물어지면서 국가 과학기술 연구개발 체제가 통째로 흔들리는 현상이 나타나고 있다. 이에 따라 이를 바로 잡기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지적이 과학계 일각에서 불거져 나오고 있다. 올바른 국가 연구개발체제를 위해서는 대학이 기초연구분야로 옮겨가야 하며 출연연은 장기 응용 및 기초 연구분야의 업무 비중을 늘리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게 과학계의 지적이다.
“출연연에 들어와서 세계적인 수준의 응용연구를 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지만 현실은 1∼2년 내에 상품화할 수 있는 연구만이 돌아왔습니다.”
미국 유수 대학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출연연에 들어가 국내 과학기술계의 발전에 이바지하려 했다는 과학자의 말이다. 3∼5년을 앞서가는 응용기술 개발 프로젝트를 제안하면 번번이 과제 선정 과정에서 고배를 마셔야 했다는 이 과학자는 연구과제를 따기 위해 당장 눈앞에 보이는 기술 개발만 제안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비판했다.
그는 “미국 대학에 있을 당시에는 세계적 권위를 자랑하는 과학지인 네이처나 사이언스에 연구결과를 발표하는 활발한 활동을 했었다”며 “하지만 한국의 출연연에서 이런 모습을 보이는 과학자가 드문 것은 출연연 시스템상의 결함 때문”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외 대학에 있을 땐 세계적인 연구자였던 한 인재가 출연연에 몸담으면서 국가기술력 향상에 필수적인 장기적이고 근복적인 연구를 하지 못한 채 방향감각을 상실, 대형 프로젝트 따기에만 급급한 ‘초라한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10명 이상의 분야별 박사급 연구 인력이 팀을 이뤄 향후 5∼6년을 앞서는 연구를 하는 선진국의 공공연구기관과 달리 국내 출연연은 5명 이상의 박사급 연구원을 팀으로 구성해 연구를 수행하는 곳이 거의 없다. 또 5년은커녕 3년 앞을 내다보는 연구 프로젝트는 자금을 유치할 곳이 없어 대신 해외에서 연구한 기술을 카피하기에 급급한 실정이다.
실정이 이렇다 보니 출연연이 연구하고 있는 과제는 이미 기업 내 연구소에서 개발된 것이 다반사다. 모 벤처기업 사장은 “2년여에 걸쳐 수십억원의 연구비를 들여 알고리듬을 구성하고 소프트웨어를 완성해 팔려고 하는 시점에 출연연이 비슷한 형태의 소프트웨어를 싼 값에 경쟁기업에 기술 이전했다”고 흥분하며 “정부가 자금을 들여 연구하는 과제로 인해 벤처기업이 수년간 피땀 흘려 연구한 성과를 물거품으로 만들게 했다”며 출연연의 근시안적인 연구 방향에 대해 강력히 비판했다.
정부의 예산으로 연구가 결정되는 출연연은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이 바뀔 때 마다 연구 방향도 함께 흔들린다. 이 역시 출연연의 발전을 저해하는 큰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정보기술의 강력한 발전을 외치는 장관이 새로 임명되면 관련 출연연은 연구하던 과제의 방향을 모두 장관이나 정책담당자의 취향에 맞춰 바꾸기 일쑤다. 이렇게 자주 변경되는 연구개발사업에 몸담고 있는 과학자들은 미래에 대한 예측 불가능으로 안정적으로 중장기 연구에 몰두하기 어렵다고 하소연하고 있다.
‘국가연구개발체제 및 운영 효율화’에 관한 보고서를 작년 11월 발표한 바 있는 한국표준과학연구원의 이병민 박사는 “출연연은 국가 연구소로서 공공 책무성을 확립하고 경영의 투명성 확보와 함께 조직의 유연성도 유지, 연구 생산성을 증대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산업계의 수요를 접목할 수 있는 연구기획체제를 구축하고 기반연구 중심의 연구센터와 사업중심의 이익센터를 혼합 운영하는 유연한 조직으로 출연연을 재정립해야 한다”며 출연연의 나아갈 방향에 대해 언급했다.
<김인순기자 insoon@etnews.co.kr>
◆기고(과학기술정책연구원 박태민 부연구위원)
젊은 과학기술도의 취업길이 날이 갈수록 험난해져 가고 있다. IMF를 거친 기업은 인력을 찾는 데 더 없이 조심스러워졌고 소위 신기술을 전공한 석사, 박사조차 정작 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다.
그러나 과학기술인력을 키우고 다듬는 노력을 피할 수는 더더욱 없는 노릇이다. 국제경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중국은 허리춤을 잡고 있고 선진국은 또 한번 도약을 할 기세다. 그나마 회복기에 들어선 우리나라 경제를 살리는 길은 과학기술자를 키우고 세계 일류 기술을 개발하는 길 외에 없다.
이제 쟁점은 대학 문을 나서는 과학기술도가 많고 적음의 문제가 아니다. 어떻게 수요를 늘이고 어떻게 이들을 효과적으로 활용할지에 관심을 두어야 한다. 1만달러 시대를 넘어 2만, 3만달러 국가로 진입하는 병목에 과학기술인력 문제가 있다. 인력을 키움에 있어 나갈 곳을 마련해 선순환을 확보하는 것만이 막혀있는 물꼬를 트는 열쇠다. 그 열쇠를 쥐고 있는 곳이 바로 대학과 정부출연구소다.
출연연은 인력의 저수지(reservoir) 역할을 해야 한다. 신기술 분야처럼 아직 기업의 인력수요가 성숙되지 못한 경우라도 신진 연구인력이 대학문을 나서서 연구해 진력할 수 있는 장이 필요한 것이다. 교육투자가 개인의 몫이라면 양성된 인력을 활용하는 것은 국가의 몫이다. 향후 10년간 대학진학자는 감소할 것이고 인력 수요처로서 대학의 역할은 감소할 수밖에 없다. 구조조정을 거쳤던 기업은 인력 고용에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출연연이 인력수급 조정과 안정화에 완충재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우리 과학기술 인력의 문제는 인력이 지나치게 단향적으로 흐르고 있는 점이다. 선진국에 비해 인력의 규모가 작다면 이들 인력을 최대한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것이 중요하다.
유능한 인력을 적극 활용하려면 국가연구원제도 틀에 출연연을 두고 이 틀 안에서 연구원의 출연연간 이동을 자유롭게 하는 것도 방안이 될 수 있다. 조건을 만족한다면 기업과 대학에서 일정기간 동안 활동한 후에 다시 출연연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는 시스템도 출연연과 대학, 기업 3자의 수요를 모두 충족할 수 있는 방법이다.
또 우수한 인력이 과학기술 분야에 관심을 갖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도 중요하다. 탁월한 대학생, 대학원생의 경우 준국가연구원으로 선정하고 이들에 파격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면 우수한 고등학생의 발길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새로운 문화가 사회의 관행과 개인의 가치관을 바꾸는 현실에서 과학기술에 대한 애정과 책임으로 인력을 묶어 놓기에는 이미 사회·문화적 환경이 크게 변했다. 인력을 키움에 있어 쓸 곳을 마련하는 것, 그래서 선순환을 확보하고 우수 인력을 유인하는 것만이 지금의 인력 문제를 푸는 유일한 방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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