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과 가전업체들이 서로 책임을 떠넘기며 질질 끌어오던 디지털TV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미국 연방통신위원회(FCC)가 강수를 던졌다.
FCC는 지난 8일(현지시각) 회의를 갖고 “2007년까지 TV 제조업체들은 모든 중대형 TV수상기에 디지털 튜너를 달아야 한다”고 결정했다. 이와 함께 FCC는 디지털TV의 보급을 촉진하기 위해 프로그램의 디지털 복제 방지 기술을 채택할 것을 만장일치로 권고했다.
FCC는 36인치 이상의 대형 스크린을 가진 TV의 경우 2004년 7월까지, 13∼35인치 스크린을 가진 TV는 2007년까지 점진적으로 디지털 튜너를 내장하도록 결정했다.
마이클 파월 FCC 의장은 이번 조치로 “디지털TV 방송 실현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말했다.
FCC가 손을 들어준 셈이 된 방송업계는 이번 결정을 환영했다. 전미방송협회(NAB)는 “455개의 방송국이 전체 TV 보유 가정의 90%에 디지털 방송을 송출하지만 판매되는 TV의 1%에만 디지털 튜너가 내장된 형편”이라며 가전업계에 화살을 돌렸다.
그러나 가전업계는 이번 결정에 거세게 반발하고 있다. 미국소비자가전협회(CEA)는 디지털 튜너를 내장하면 TV 한대당 250달러까지 가격이 상승해 소비자 부담이 커진다고 주장해왔다. CEA의 게리 샤피로 회장은 “소비자에게 어떤 제품을 사라고 정부가 강요할 순 없다”며 “이번 조치는 TV에 세금을 물리는 것과 다름없다”고 말했다. 소비자 단체들도 이번 조치로 디지털TV 확산 효과는 거두지 못하고 소비자 부담만 늘 것이란 입장을 표했다.
이번 회의에서 유일하게 반대표를 던진 케빈 마틴 FCC 위원도 “미국 가정의 90%가 케이블이나 위성을 통해 TV를 시청하는 상황에서 지상파 디지털 튜너 설치를 의무화하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반대 이유를 밝혔다.
이에 대해 마이클 파월 의장은 “디지털 튜너 내장 TV의 대량생산이 이루어지면 가격은 곧 하락할 것”이라며 반대파의 주장을 일축했다.
FCC의 이번 결정은 고화질 디지털TV의 보급을 촉진하려는 미 의회의 입장을 재확인하는 것이다. 방송사들은 디지털 튜너의 보급률이 85%가 넘으면 현재의 아날로그 주파수를 반환해야 하며 미 의회는 반납된 주파수를 이동전화 등 다른 산업용으로 경매할 계획이다.
FCC는 또 방송사나 영화사들이 우려하는 프로그램의 디지털 불법복제를 방지하기 위해 방송 프로그램에 이른바 ‘방송깃발’을 삽입할 것을 권고했다. ‘깃발’은 해당 프로그램의 디지털 복제가 허가되지 않았음을 표시한다. FCC는 “디지털 콘텐츠는 쉽게 복제돼 인터넷을 통해 걷잡을 수 없이 퍼질 수 있다“며 보호조치의 필요성을 주장했다. 소비자단체와 가전업계는 이 조치가 소비자의 ‘정당한 이용권’을 침해하며 기술적으로도 효과가 의문스럽다는 입장이다.
FCC는 10월까지 ‘깃발’ 기술에 대한 의견을 공개 수렴한다.
<한세희기자 hahn@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