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인 반도체 제조회사가 있는 나라는 그에 부합하는 세계 수준의 반도체장비회사도 함께 가지고 있다. 첨단 반도체 제조기술과 이를 실현할 수 있는 장비는 상보적인 관계로 함께 발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는 세계적인 반도체기업은 있지만 세계 일류의 장비업체는 없다. 업계는 그 원인을 정부의 미흡한 육성정책과 열악한 시장규모 때문이고 말한다. 세계 일류 장비업체를 육성하기 위한 산업계의 문제점과 과제 등을 살펴본다. 편집자
1. 구조조정에 인색한 장비업계
우리나라 장비업계는 인력구조조정에 매우 인색하다. 사상 최대의 반도체 불황으로 손꼽히는 지난해의 위기상황에서도 공개적인 감원을 실시한 업체는 레이저장비 제조업체 이오테크닉스 한곳에 불과했다.
물론 불황 극복 수단으로 감원이 능사는 아니다. 감원 없이 노사가 똘똘 뭉쳐 또 다른 비용절감 방안을 찾아내고 이를 바탕으로 위기를 헤쳐나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책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하지만 지난해의 상황은 달랐다. 반도체 특히 메모리 가격은 연일 바닥을 모른 채 제조원가 이하로 추락했고 얼어붙은 설비투자심리로 인해 하반기부터 반도체 제조장비 매출은 제로에 가까운 수준으로 급락했다. 더욱이 한해만 잘 버티면 반도체 불황이 끝날 것이라는 보장도 없었다. 그야말로 시계 제로의 상황이었다.
국내 대부분의 업체들은 노사간의 정(情)을 고려해 개인적인 사유로 회사를 떠나는 자연감원이 아닌 인위적 감원을 실시하지 않았다. 일부 업체의 경우 명예퇴직 형태로 감원을 실시하기도 했지만 이 사실이 행여 회사 밖으로 흘러나가지 않을까 전전긍긍하는 모습을 보여왔다.
투명경영이 몸에 밴 외국 장비업체들이 기업생존력 강화와 주주의 손실 최소화, 주주의 알 권리 충족 등을 위해 공개적이면서도 대대적인 감원을 단행하는 모습과는 대조적이다.
반도체 불황이 극심했던 지난해 전세계 반도체장비업체들은 전년대비 전공정부문은 28.6%, 후공정부문은 55.8%나 매출이 감소하는 위기에 직면했다. 대부분의 외국업체들은 불황이 예고됐던 상반기에 1차적으로 비용을 줄이는 방법을 택했고 이마저도 기업생존에 큰 도움이 되지 못하자 결국 인원감축을 단행하는 용단을 내렸다.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는 지난해 상반기 전체 직원의 5%에 해당하는 1000명을 감원하고서도 사정이 나아지지 않자 하반기 2000명을 추가로 감원, 연간 약 15%의 인력을 줄였다. 테러다인은 1만명의 직원 중 작년 상반기에 2000명, 하반기에 1000명 등 총 3000명을 감원했다. 이밖에도 노벨러스, KLA-텐코, 맷슨, 스피드팸아이펙, 램리서치 등이 줄줄이 생존 차원의 감원에 나섰고 도쿄엘렉트론 등 일본의 장비업체들도 20∼30% 가량의 감원을 실시했다.
기업의 존폐여부를 위협받는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서 외국 유수의 장비업체들과는 달리 국내 업체들이 자연감원에 의존했던 것은 우리나라 장비시장 상황이 상대적으로 좋아서는 아니다.
지난해 우리나라 반도체장비시장은 세계시장의 평균 감소율을 웃돌았다. 우선 대형 수요처인 하이닉스반도체가 경영위기에 직면해 설비투자를 사실상 중단했고 삼성전자는 설비투자 축소 선언과 함께 장비업계에 고통분담 차원에서 장비가격을 파격적으로 인하할 것을 요구했다.
게다가 국내 장비업체들의 상당부분이 후공정장비업체라는 점에서 전공정부문 비율이 높은 해외 선진장비업체에 비해 위기강도는 훨씬 더 높았다.
업계의 한 전문가는 “우리나라 장비업체들은 비교적 역사가 짧아 지난해의 위기가 기업 설립 사상 처음으로 직면한 위기였던 경우가 대부분이었다”며 “만일 지난해와 같은 위기상황이 올해 말까지 이어졌다면 우리나라 장비업체 중 3분의 2 이상이 문을 닫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국내 장비업계가 불황기 감원, 호황기 재고용 등의 방법을 적절히 구사하는 해외 선진업체들의 위기관리능력을 배우지 않고 지금과 같은 우유부단한 경영방식을 고수한다면 추후 도래할 혹독한 시련기에 퇴출을 면하기 어렵다”고 덧붙였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