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정관념을 버려라.’
선진국의 기업들은 정보기술(IT)을 생산성 향상으로 직결시키기 위해 회사에 대한 기존 개념을 송두리째 바꾸고 있다. 대표적인 예가 원격근무와 영상회의의 도입. ‘출퇴근’과 ‘출장’을 고집하지 않고 직원들을 시공의 제약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는 것이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금문교를 건너면 나타나는 밀밸리는 언뜻 보기에는 조용한 베드타운 같지만 대도시 마천루처럼 바쁘게 돌아가는 곳이다.
이곳에 사는 조 클래드웰은 자신의 집에서 컴퓨터로 백만장자 고객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관리한다. 역시 같은 밀밸리에 사는 여행 매니저인 로빈 톰슨도 웰스파고은행이나 오라클 같은 대기업 고객의 출장과 회의, 호텔 예약 등의 업무를 집에서 처리한다. 또 컴퓨터 컨설턴트 마릴린 잭슨 역시 밀밸리에서 하루에 3명의 고객을 상대로 재택 근무를 한다.
필라델피아에 소재한 보험회사인 시그너의 경우 4만3000명 직원 중 2100명이 재택 근무를 하고 있다. 재택 근무자들은 이를 위한 별도의 훈련을 받고 홈 오피스 장비와 기술 지원까지 받는다.
미 통계청에 따르면 일주일에 3∼4일 집에서 일하는 재택 근무자의 수는 지난 90년 340만명에서 2000년 420만명으로 늘어났다. 특히 밀밸리는 1만4000명 전체 주민의 15.4%가 재택 근무자로 캘리포니아주에서 재택 근무자가 가장 많은 지역이다.
여기에 일주일에 하루 내지 이틀을 집에서 일하는 수백만명을 포함시키면 실제 재택 근무자 수는 훨씬 늘어난다.
재택 근무가 늘고 있는 것은 직원 입장에서는 업무 시간을 자신의 사정에 맞춰 편리하게 조정할 수 있는데다 출퇴근에 시달릴 필요도 없어 회사에 대한 만족도가 올라가고, 기업 입장에서도 재택 근무자들이 집중도가 높아 업무 효율이 높아진다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 컴퓨터 방화벽을 이용해 안심하고 기업 네트워크에 연결할 수 있게 된 것도 한 몫하고 있다.
실제 시그너의 경우 재택 근무 실시 후 생산성이 15% 높아지고 일부 부서의 이직률이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다.
재택 근무를 원격지에 거주하는 유능한 인재를 끌어들이는 수단으로 활용하는 기업도 늘고 있다. 이미지 소프트웨어 업체인 사이매직스는 기술자 확보를 위해 일주일에 2일간의 재택 근무를 허용하고 있다.
지적재산권 전문 변호사 크리스 마티니악은 최근에는 온라인 영상회의로 거의 모든 업무를 본다. 그는 이전에는 업무상 미 전역 각지에 있는 고객과 전문가 증인, 동료 변호사 등 상대방의 일을 봐주어야 할 때면 부랴부랴 공항으로 나가 비행기를 타야만 했다.
그가 일하는 샌프란시스코 법무법인 헬러에르먼 화이트 & 맥올리프는 이 같은 출장 여행 대신 최근 지속적으로 인기를 끌고 있는 인터넷 영상회의 서비스 업체 중 하나인 웹엑스와 계약을 맺고 서비스를 받고 있다.
마티니악 변호사는 “지난 6개월 동안 웹엑스 덕에 적어도 5차례 정도의 미국 횡단 여행을 하지 않아도 됐다”며 “출장의 필요성이 아예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비행기를 타지 않아도 되는 경우가 늘었다”고 밝혔다.
통신장비 업체인 알카텔은 중국 상하이에 아태지역 본부를 서립하면서 호주·뉴질랜드·일본 등지의 현지법인을 영상회의 시스템으로 연결해 효과를 보고 있다. 각 현지법인의 임원들은 온라인 회의 도입 이후 전체 업무 시간의 70% 정도를 차지하던 출장 시간을 30% 이하로 줄일 수 있었다.
웹엑스, 플레이스웨어, 레인댄스커뮤니케이션스 등 주요 웹 영상업체들의 솔루션은 직접 위성 접속을 할 필요 없이 인터넷이나 LAN을 이용해 저렴하게 영상회의가 가능하게 해주기 때문에 사용 기업이 더욱 늘어나는 추세다.
실제 웹엑스와 플레이스웨어의 지난해 총 고객수는 각각 5000명과 4200명으로 전년보다 2배 가량 늘어났다.
업무 절차를 개선해 직원들이 쓸데 없는 데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막는 것도 중요한 관심사가 되고 있다.
우주항공 업체인 보잉의 직원들은 이제 더 이상 팩스 때문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는다. 앉은 자리에서 웹을 통해 명령만 내리면 팩스와 팩스모뎀이 연결된 인터넷 팩스 서버가 모든 일을 처리해주기 때문이다. 보잉은 현재 인터넷 팩스를 이용해 매달 1만8000통의 팩스를 전송하고 1만5000통을 받는다.
보잉이 인터넷 팩스를 도입한 것은 앞으로 5년 이내에 전자우편, 음성우편 및 팩스 등 모든 업무상의 통신을 통합 메시징 시스템을 통해 해결하기 위한 계획의 일환이다.
시스코시스템스의 경우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임원들이 직원의 비용 지출 보고서를 결제하는 데 근무시간의 10% 가량을 할애해야만 했다. 그러나 현재 시스코의 직원은 모두 온라인 비용계정 파일을 이용하기 때문에 이같은 관료주의적인 절차 때문에 허비되는 시간이 사라졌다. 시스코는 이같은 업무 절차 개선을 통해 경상비를 8억2500만달러나 절약할 수 있었다.
선은 영업직원들이 사무실에서 보내는 시간을 줄이고 고객을 만나는 시간을 늘리도록 해 생산성을 높이고 있다.
선은 캠벨과 뉴와크, 샌프랜시스코의 세 곳에 직원들이 잠시 들릴 수 있는 임시 사무실을 마련하고 이곳에 직원이 스마트카드를 삽입하면 자신의 PC에 저장된 것과 똑같은 정보를 찾아볼 수 있도록 해주는 선 레이(Sun Ray)를 설치했다.
생산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항상 첨단의 기술만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전문가들은 발상의 전환만 있다면 기존의 IT만으로도 생산성을 손쉽게 올릴 수 있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황도연기자 dyhwang@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