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1)타이타닉과 SOS(하)

 

타이타닉호의 조난소식을 듣고 사고현장으로 방향을 바꾼 카르파티아호에는 전신기사가 한명밖에 없었다. 그는 사고 당일인 1912년 4월 14일 하루종일 몹시 바빴다. 오전 7시에 일을 시작했지만 자정이 다 되어가는 시각까지 다른 배로 보낸 메시지를 수신했다는 응답을 듣기 위해서 이어폰을 끼고 있어야 했다. 기다리는 시간에 이리저리 통신채널을 검색하던 그는 우연히 타이타닉호로 보내는 메시지를 모니터하게 되었다.

당시 화제의 대상이던 타이타닉호로 가는 통신에 관심을 가진 전신기사는 잡담 스타일로 타이타닉호로 메시지를 보냈다. ‘이보게 친구, 매사추세츠 케이프코트에서 자네에게 보낸 무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라는 내용이었다. 그때 긴급 메시지가 날아들었다.

 ‘당장 와달라. 빙산에 충돌했다. 비상사태(CQD)가 발생했다.’

 너무나 황당한 내용으로 넋이 나간 그는 엉뚱한 질문을 했다.

 ‘우리 배의 선장에게 알려야 하는가? 도움이 필요한가?’

 즉각 타이타닉호에서 회신이 왔다.

 ‘물론이다. 빨리 와달라.’

 카르파티아호의 전신기사는 옷을 대충 걸치고 브리지로 달려가서 당직중인 1등항해사와 함께 선장실로 내려가 로스트론 선장을 깨웠다. 상황을 파악한 로스트론 선장은 해도를 통해 배가 사고 발생 지점에서 동남쪽으로 92.8㎞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일련의 체계적이고 예리한 지시를 내리기 시작했다.

당직중이던 선원은 물론 비번인 선원들에게도 생존자들을 맞이할 준비를 하라는 명령을 시달했다. 구명보트 18척이 바다 위로 내려질 준비가 완료되었다. 배의 출력을 높이기 위해 수많은 석탄이 보일러속으로 던져졌고, 보조설비를 차단하여 배의 속도를 증가시켰다. 생존자들을 위해 담요를 모으고, 따뜻한 음료수와 수프를 준비했다. 승선중인 의사 3명을 대기시켰다.

그 와중에 카르파티아호의 전신기사는 타이타닉호가 직접 보내는 마지막 메시지를 받았다.

 ‘보일러 엔진실에 물이 찼다.’

 타이타닉호의 상태가 매우 심각하다는 판단에 카르파티아호는 속도를 더 높였다. 굴뚝에서는 엄청난 양의 시커먼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구조대가 곧 도착할 것이라는 신호로 하늘에 로켓을 발사했다.

한편, 타이타닉호가 빙산에 부딪힌 후 배에 서서히 물이 차오르기 시작하자 여자와 어린이들이 먼저 구명보트에 태워졌다. 이어 구명보트 14척, 커터 2척, 구명뗏목 2개가 차례로 내려졌다. 2201명이 타고 있었지만, 구명정에는 그 절반 인원밖에 태울 수가 없었다. 승객의 절반 이상은 이미 죽음을 선고받고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이 구명보트에 옮겨 타기를 망설였다. 세계 최고의 배가 쉽사리 침몰하지 않으리라는 생각 때문에 처음에 내려진 보트에는 정원이 다 차지도 않았다.

새벽 1시가 지나면서 타이타닉호는 뱃머리부터 가라앉기 시작했다. 그때 승객들도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실감했지만, 이미 보트는 헤아릴 수 있을 만큼밖에 남아 있지 않았다. 절망적인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배안에는 불가사의한 분위기가 감돌고 있었다. 악단은 끝까지 음악을 연주했고, 어떤 노부부는 둘이서 조용히 앉아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또 어떤 신사는 어차피 죽을 바에는 신사답게 죽고 싶다고 구명조끼와 스웨터를 벗고 야회복으로 갈아입기도 했다.

오전 2시 20분. 타이타닉호는 완전히 물속으로 가라앉았다. 빙산과 충돌한 지 2시간 40분만의 일이다. 조난신호를 받고 현장으로 출발한 카르파티아호가 현장에 도착해 표류하고 있는 구명보트를 발견한 것은 4시 20분. 조난신호를 접수한 지 3시간 반이 지난 후였다. 10분 뒤, 생존자들은 카르파티아호로 기어오르거나 들어올려지기 시작했다. 구조된 인원은 711명. 약 70%의 승객들이 타이타닉호와 운명을 같이한 셈이다.

사고 당시 타이타닉호와 31.2㎞ 거리로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던 여객선 캘리포니안호는 타이타닉호에서 보낸 ‘SOS’와 ‘CQD’ 신호를 받지 못했다. 빙산에 대한 경고 메시지를 보낸 후 통신에 방해된다는 내용의 메시지를 받고 무전기사가 잠들어버렸기 때문이다. 날이 밝아오면서 드러난 사방 6∼8㎞의 면적에 퍼져 있는 거대한 빙산 수십개와, 수면 위로 드러난 높이만 60m가 넘는 20여개의 유빙들을 피해가면서 사고현장에 도착한 캘리포니안호는, 카르파티아호의 뒤를 이어 현장을 수색했지만 단 한명의 생존자도 구출하지 못해 끝내 죽음을 방치한 배로 낙인찍히고 말았다.

타이타닉호 승객의 구조를 통해 일약 영웅으로 떠오른 로스트론 선장은 통신실에서 발신되는 모든 내용을 통제했다. 때문에 전세계는 타이타닉호 참사에 관한 조그만 소식이라도 한참을 기다려야만했다. 보도기관을 비롯해 여러곳에서 정보제공을 요청했지만 아무런 대답을 듣지 못했다. 미국 태프트 대통령의 요청도 묵살되었고, 화이트스타의 뉴욕 사무실로 참사내용을 보고하는 사장 이즈메이의 메시지도 4월 17일 수요일에야 송신되었다.

로스트론 선장의 통신 장악을 통해 당시 타이타닉호의 소식은 무제한적인 가치를 부여받았다. 많은 통신사들이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그 정보는 곧 돈과 결부되었다. 전신기사들은 타이타닉호의 정보를 제공해주면 돈을 주겠다는 제안을 받기도 했다.

한편으로, 타이타닉호의 침몰과정에서 조난신호 발신과 생존자 구조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무선통신에 대한 경이로운 찬사가 이어졌다. 만일 무선통신이 없었다면 그 많은 생존자들도 목숨을 잃어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무선통신으로 전해진 경고 메시지만 잘 확인하고 주의했더라도 타이타닉호는 빙산과 부딪히지 않았을 것이다. 반대로 조난신호인 ‘SOS’와 ‘CQD’ 신호를 카르파티아호가 확인하지 못했더라면 수백명의 희생자가 더 발생했을 것이라는 결론에 당시 무선통신사업을 수행하던 마르코니회사의 주가는 폭등했고, 일부 인사는 그 와중에도 그 회사의 주식을 구입해 폭리를 취하기도 했다.

로스트론 선장의 통신매체 장악에도 불구하고 뉴욕에서는 타이타닉호가 곤경에 처했다는 소식이 4월 15일 월요일, 현지시각으로 아주 이른 시각에 알려졌다. 아마추어 무전전신기사이자 보도 예상 전문가인 한 젊은이가 맨해튼 시내의 고층건물 옥상에 통신실을 차려놓고 해상의 통신메시지를 모니터하다가 중계송신국의 메시지를 도청, 자신의 고객들에게 전했기 때문이다.

여기에서, 타이타닉호에 탑승했던 무선통신사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타이타닉호에는 두명의 전신기사가 타고 있었다. 통신실에서 지속적으로 ‘SOS’ 신호와 ‘CQD’ 신호를 보내던 전신기사들은 침몰 5분 전에 선장으로부터 업무에서 손을 떼어도 좋다는 명령을 받았다. 하지만 그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통신을 수행하다 침몰 직전 배에서 탈출했다. 그 중 한명은 구명보트에 매달린 채 차가운 바닷물에 동사하고 말았고, 다른 한명은 간신히 구명보트에 올라 목숨을 건졌다. 구조된 전신기사는 동상을 입은 채로 구조선 카르파티아호에서 통신업무를 계속 수행했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