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헬레나 노르베리 외 지음/녹색평론사 펴냄
사회의 변동과 역사의 진보를 설명하는 많은 이론 중에 현대 인류·세계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근대화 모델이다. ‘개발된’ 국가들의 발자국을 따라감으로써 ‘저개발’ 국가들도 부유하고 안락해질 수 있으며, 생태계 위기를 초래하는 인구폭증과 환경문제도 해결된다는 것이다.
스웨덴 출신의 여성학자 헬레나 노르베리 호지의 ‘오래된 미래-라다크로부터 배운다’는 ‘개발’ ‘근대화’ ‘서구화’ ‘산업화’를 동의어로 간주해온 근대화 프로젝트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 제기이자 현대 산업문명에 대한 신랄한 자기비판이다. 16년간의 현지 체험에 바탕을 둔 이 책에서 저자는 전통적인 라다크의 사회적·생태적 균형을 애정어린 시선으로 재생해내는 한편 개발이 그것을 어떻게 붕괴시키고 있는가를 안타까움과 분노의 시선으로 그려내고 있다.
호지가 75년 처음 라다크에 갔을 때 마을의 생활은 몇 세기 동안 이어진 방식 그대로 이뤄지고 있었고, 사람들은 고래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환경에 걸맞는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었다. 75년 인도 정부의 개방과 개발 결정은 라다크의 이 같은 일상을 급격히 변화시켰다. 세계의 다른 어느 곳과 마찬가지로 라다크에서도 개발은 철저하게 서구식으로 진행됐다. 그 주요 내용은 도로와 에너지 생산 같은 ‘하부구조’의 건설이나 외화를 약속하는 관광사업 등이었다. 이 같은 개발과 개방이 현지인들에게 한편으로는 서구적 기술 문명의 혜택을 일부 나눠줬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가난과 불행, 열등감과 스트레스라는 익숙치 않은 부산물을 안겨줬고 예전에 ‘먹을 것도 마실 것도 넉넉하다’고 말하던 사람들이 ‘우리는 가난해요. 우리는 개발을 해야 돼요’라고 단언하기에 이르렀다.
저자는 라다크인들이 배우면 배울수록 자신들의 건강한 뿌리로부터 멀어져가고, 라다크 사회가 개발되면 될수록 붕괴돼 가는 현실을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지 않았다. 그녀는 이 사실을 라다크인들에게 납득시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으며,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라다크의 비극을 고발했다.
그녀의 노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라다크의 비극이 확산되는 것을 막기 위해 그녀가 선택한 새로운 키워드가 바로 ‘반개발(counter-development)’이다. 반개발은 지구의 생명을 떠받치는 다양성을 보호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위한 조건들을 만들어내는 것에 1차적 목표를 두고 있다. 그런 만큼 이것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경제의 탈중심화, 에너지 생산의 탈중심화, 적정기술 등이 수반돼야 한다.
돌이켜보건대 현대사회의 여러 질병과 역기능은 현대 자본주의 질서가 스스로 근대화 과정에서 만들어놓은 부산물인 듯하다. 과(過)발전·저((低)발전·미(未)발전이 특정 지역·특정 국가의 범위를 넘어 전지구적 차원에서 공존하는 현상, 그리고 성장 신화의 확산과 이에 대한 반작용으로서의 지역공동체 및 생태계 파괴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의 전형적 특징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현대가 이룩해놓은 근대화가 서구적 합리성에 따라 진행된 ‘단순한’ 것이었다면 노르베리 호지가 설파하는 반개발은 산업사회 전체, 즉 우리가 몸담고 있는 현시대의 지배적 담론구조의 창조적 자기파괴 가능성을 열고 있는 새로운 개발모형이다. 그런 점에서 ‘오래된 미래’는 서구적 방식의 근대화에 회의적인 사람은 물론 개발의 새로운 모형을 찾아나선 이들에게도 권할 만한 책이다.
<김종길 덕성여대 교수 way21@duksung.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