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비업체의 위기관리능력 부족, 인맥에 의존한 영업, 업체간의 과당경쟁 외에도 소자업체들의 횡포도 문제다.
반도체 장비와 재료 가격은 한번 떨어지면 다시는 올라갈 수 없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가격협상의 칼자루를 쥔 소자업체들이 이를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여러곳의 장비업체 중 한두곳만을 골라 거래할 수 있는 특권을 지닌 소자업체들의 영향력은 막강하다.
생산성에 절대적인 영향을 미치는 전공정 핵심장비의 경우 상황은 다르겠으나 장비별로 성능차이가 거의 없는 전공정 부가장비나 후공정장비 부문에서는 장비 발주시 소자업체의 ‘아량’이 작용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애석하게도 우리나라 장비산업은 후자의 성격이 강하다.
간혹 소자업체에 밉보여(지나친 로비로 소자업체의 눈밖에 나는 경우를 포함) 거래중단 선고라도 받을라치면 해당업체는 기업 존폐의 위기에 몰리는 사례가 발생하기도 한다.
본래 반도체장비산업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공정기술을 보유한 소자업체들의 수평적인 지원이 필수적이지만 도가 지나친 수직관계가 만연되는 상황에서는 상보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과 일본의 장비업체들이 세계적인 명성을 쌓을 수 있었던 중요한 원인으로 소자업체의 지원이 필수적이었다는 점은 소자업체나 장비업체, 정부 모두다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실천이 제대로 되지 않는 것이 문제다.
최고 성능의 장비를 값싸게 도입하기 위해 자국내 장비업체를 키우는 소자업체의 전략마련이 시급하다.
국내 산업규모에 비해 장비업체의 수가 너무 많다는 것도 문제다. 해외시장 창출이 손조롭게 진행된다면 전혀 문제될 것이 없겠지만 내수시장에서의 검증작업 없이 해외시장을 직접 공략할 수 없는 장비산업의 특성을 고려하면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올해 초 전자신문에서 기업을 공개한 15개 반도체장비업체 경영자를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에서 ‘업계 경쟁력 향상을 위해 동종업체간 인수합병(M&A)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 1개 업체만 ‘모르겠다’고 답한 반면 나머지 기업 모두는 ‘M&A가 필수적’이라고 답한 바 있다.
그들은 M&A가 필요한 이유로 △외국의 대형 장비업체에 비해 체질이 허약한 국내업체가 견실해지기 위해 △국내업체간의 과열경쟁을 막기 위해 △중복투자 방지 및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해라고 답했다.
또 일부 기업은 당장이라도 기술경쟁력을 확보한 동종기업으로부터 M&A 또는 전략적 제휴 제안이 들어온다면 수락하겠다는 입장을 밝히기도 했다.
장비업계 1세대에 속하는 업체의 한 경영자는 “세계 1위 반도체장비기업인 미국의 어플라이드머티리얼스의 연간 R&D 투자금액이 우리나라 반도체장비업체 전체의 연간 매출보다 많다는 현실을 간과해서는 안된다”고 지적한다.
진정 세계 제1의 장비업체가 국내에서도 나오기를 희망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창출하기 위한 동종 장비업체간의 합종연횡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견해다.
그는 “설령 당장의 M&A 실천이 불가능하다면 동종의 장비업체들이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한의 성과를 거둘 수 있는 공동 R&D라도 추진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늦었다고 생각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처럼 우리나라 장비산업의 발목을 잡는 검림돌을 제거해 세계 제일의 장비업체를 만들어갈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다. 다만 어느 한쪽만의 노력이 아닌 업계 종사자 모두의 노력이 필요하며 선의의 경쟁과 시너지 효과 창출을 위한 공조에 나설 때 비로소 세계 제일을 지향하는 ‘꿈’은 실현될 수 있을 것이다.
<최정훈기자 jhchoi@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