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 IT문화를 만들자>(31)4부 시민과 국가가 나서야 한다(1)프롤로그

 지난 98년 6월, 국내 문서편집SW업계의 대표주자 한글과컴퓨터(이하 한컴)는 “미국 마이크로소프트(MS)의 투자를 유치하는 대신 ‘아래아한글’ 프로그램의 개발 및 사업을 전면 포기한다”는 폭탄선언을 했다. 그동안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MS의 ‘워드’와 맞대결을 벌이며 한국 IT업계의 자존심을 지켜온 한컴이 거대 IT공룡인 MS에 사실상 항복을 선언하는 셈이었다.

 국내 언론은 물론 전세계 언론들도 이를 대서특필하며 MS의 한국 시장 점령을 알렸다. 당사자인 한컴을 비롯한 국내 IT업계 종사자들도 거대한 자본을 앞세운 글로벌기업과 맞서는 것은 불가능하다며 패배를 인정하는 분위기가 이어졌다.

 하지만 천리안·하이텔 등의 PC통신 동호회를 필두로 한 네티즌들의 반응은 전혀 달랐다. 온라인 시위를 방불케 할 만큼의 항의성 메시지와 한컴을 응원하는 격려메시지가 쏟아져나왔다. 급기야 한글살리기 국민운동본부가 결성되고 한글을 살리기 위한 성금 모금에 각계의 정성이 답지했다. 이에 각 시민단체들도 한글살리기 운동에 동참해 힘을 더했다. 시민단체들은 전문가들을 초빙해 토론회를 여는가 하면 정부 기관에 한컴살리기 메시지를 전달하며 시민들의 힘을 한 곳으로 모았다.

 이러한 시민들의 강력한 대응에 힘입어 한컴 사태는 새로운 국면으로 발전했다. 한컴은 MS와의 협상을 중단했고 국민운동본부측이 한컴을 인수키로 하면서 사실상 MS의 패배로 끝이 났다. 당초 단순히 네티즌들이 불만을 토로하는 수준에서 끝날 것으로 보였던 한글살리기가 전국민 운동으로 번지며 결실을 얻어 낸 것이다. 당시 이러한 엄청난 결과를 가져온 것은 한컴이라는 하나의 회사를 살려야 한다는 인식보다는 우리만의 고유한 문자체계인 한글을 다루는 문서편집프로그램을 우리 것으로 지켜나가야 한다는 문화의식이 크게 작용했다.

 한글살리기는 단순히 여기서 그치지 않고 한컴의 위기를 불러온 불법 복제SW를 근절해야 한다는 문화운동으로까지 이어져 당시만해도 아무런 문제의식을 가지지 못했던 불법SW 사용 관행에도 큰 변화를 가져왔다. 또한 한글살리기는 이후 IT분야에서 기업의 불공정 사례나 정부의 그릇된 행정조치가 발생할 경우 시민단체를 중심으로 한 시민세력이 나서서 개선을 요구하는 시발점이 됐다.

 이처럼 글로벌기업 MS의 공세를 막아내고 새로운 IT문화를 불러온 것이 다름아닌 평범한 시민들이었다는 것은 새로운 IT문화를 정립하는 데 있어 시민들의 역할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시민이 나서야 한다.

 네티즌(netizen)은 시민을 뜻하는 시티즌(citizen)과 통신망을 뜻하는 네트워크(network)의 합성어다. 좀더 부연 설명하면 ‘사회적인 관점에서는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들간에 만들어지는 사회관계에 주목하여 네트워크를 함께 만들어가는 공동의 협동 과정이자 서로 다른 마음과 생각이 만나 새로운 아이디어와 생각을 낳는 창조적인 움직임’이 네티즌이다.(출처 두산세계대백과)

 네티즌이란 용어를 처음 소개한 사회학자 하우번은 네티즌은 단순히 네트워크를 사용하는 사람이라는 양적인 개념이 아니라 네트워크 문화를 만들고 네트워크 공동체를 꾸려나가는 의미의 함축적인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즉 IT사회에서 시민은 단순히 IT를 도구로 활용하는 데에서 그치지 않고 IT문화를 건설해나가는 문화적 활동 주체라는 적극성을 지닌다는 것이다.

 IT문화를 만들어가는 주체는 다름아닌 시민이다. 시민들의 힘은 IT 영역에서 더욱 힘을 발한다.

 불특정 다수가 공유할 수 있는 인터넷은 이러한 시민들의 역량을 한곳에 모으는 데 큰 도움을 준다.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미디어의 등장은 과거 특정한 장소에 모여야만 공유할 수 있는 시민들의 힘을 언제 어디서도 합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는 메시지의 공유를 넘어 하나의 사안에 대해 시민들이 집중된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준 것이다.

 이러한 시민들의 역량은 최근 시민사회단체를 중심으로 수면 위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국내에서 활동하고 있는 크고 작은 시민사회단체는 수백개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졌다. 과거 노동·환경·인권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뤘던 이들 시민단체는 최근에 IT의 급속한 확산과 발전에 따른 부작용을 최소화하고 올바른 IT문화를 수립하는 데에도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경제정의실천협의회, 참여연대, YMCA 같은 기존 사회단체와 인터넷의 확산과 함께 90년대 말 생겨난 진보네트워크센터, 함께하는시민행동을 비롯해 민우회, 한국여성단체연합 등의 여성단체도 올바른 IT문화 수립에 적극적으로 나서고 있는 상황이다.

 이들 시민단체는 때로는 독자적으로, 때로는 함께 힘을 모아 새로운 IT문화 창달과 그릇된 IT문화 추방에 힘쓰고 있다.

 진보네트워크센터의 오병일 사무국장은 “인터넷이 대중화된 최근의 IT세상은 단순히 산업적인 차원이 아닌 사회문화적인 시각에서 접근이 필요하다”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IT세상의 참주인인 시민이 적극적으로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국가도 나서야 한다.

 전자정부는 “정보통신기술을 활용하여 행정 활동의 모든 과정을 혁신함으로써 업무처리 과정을 효율적이고 생산적으로 개선, 정부의 고객인 국민에 대하여 질 높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는 지식정보사회형 정부”로 정의된다.(출처 두산세계대백과)

 전자정부는 좁은 의미로는 대민행정, 내부행정처리 및 정책결정, 조달 등을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제공하는 것을 말하지만 넓게 보면 첨단화된 IT인프라를 바탕으로 국민들에게 더 나은 서비스를 제공하고 올바른 IT문화를 선도해나가는 정부를 뜻한다.

 신IT문화 창달에 있어서 결코 빠질 수 없는 것이 정부다. 사실상 시민단체의 활동은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부족한 자금과 조직력으로 인해 대외 활동에서 많은 제약이 있다. 가령 21세기들어 사회문제로까지 대두되며 심각성이 커지고 있는 정보격차의 경우 시민단체의 여력으로는 온 국민에게 정보화 교육을 제공하기가 불가능하다. 또한 최근 문제가 됐던 온라인 사기 같은 경우는 정부의 강한 단속의지 없이는 문제 해결이 어려운 사안이다.

 따라서 정부도 단순히 문제가 발생했을 경우 대응하는 미온적인 자세보다는 충분한 대국민 교육과 문화캠페인을 통해 문제가 생겨날 소지를 미연에 막으려는 보다 적극적인 자세가 필요하다. 다만 이 경우에 단순한 계도 차원을 넘어서 IT세상을 통제하려는 시도는 경계해야 한다.

 지난 6월 월드컵에서 한국 축구팀과 관중석의 서포터스가 완벽한 팀워크를 이뤄 좋은 성적을 거뒀던 것처럼 운동장을 뛰는 선수의 몫은 시민들에게 맡기고 정부는 후방에서 이를 지원하는 서포터스의 역할을 맡는 것이 바람직하다.

 현재 정부 차원에서는 정보통신부, 문화부를 비롯해 정보문화센터, 정보통신윤리위원회, 영상물등급위원회 등 각종 유관단체들이 활발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이들 단체가 서로 유기적으로 협력하며 시민들과 함께 신IT문화 수립에 나선다면 인터넷상의 불법 음란물, 사기행각, 상호비방 등 그릇된 IT문화는 사라질 수 있을 것이다.<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

 

◆시민과 국가

 시민과 국가는 같이 공존하는 관계지만 한편으로는 항상 대립하기도 한다. IT세상에서도 이는 마찬가지다. 국가권력을 행사하려는 측과 이의 부당함을 강조하며 개선을 요구하는 시민세력간의 다툼이 끊임없이 이어진다.

 지난 2000년 8월 26일, 당시 정보통신망 관련 법률 개정으로 네티즌들로부터 수많은 항의성 메일을 받아온 정보통신부의 서버가 다운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정통부는 ‘분산서비스거부공격(DDoS:Distribute Denial of Service)’에 의한 해킹으로 인해 서버가 다운된 것이라고 주장했고 이를 주도한 용의자로는 당시 정통부를 상대로 온라인시위를 준비하고 있던 진보네트워크센터가 지목됐다.

 사회적으로도 큰 논란을 불러일으켰던 이 사건은 조사 결과 정통부 서버의 안정성이 미흡했던 것으로 결론이 났지만 정부와 시민간의 극한적인 대립 양상을 보여준 일례였다. 인터넷상의 음란물로부터 청소년들을 보호한다는 명목으로 법률을 개정하려한 정통부와 이를 사실상 인터넷 검열에 의한 표현의 자유 침해로 인식하고 저지에 나선 시민들간 인식의 차이를 확인할 수 있는 단적인 사례인 셈이다.

 이처럼 시민과 국가는 같은 공간에서 공존하면서도 문화 인식에서만큼은 결코 의견 일치를 이루지 못하는 모습을 계속 보여왔다. 올바른 IT문화 수립을 위해 옳지 못한 것을 통제하려는 국가와 자율적인 접근을 원하는 시민간의 의식 차이가 뚜렷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상호간 협력이 힘들다고 계속 평행선을 달릴 수는 없는 일이다. 국가는 국가대로, 시민은 시민대로 할 수 있는 서로의 몫이 있는 만큼 끊임없는 대화를 통해 얽힌 실타래를 풀어나가야 한다.

 YMCA 열린정보센터의 김종남 사무국장은 “그동안 시민단체와 국가 정부간에 협력할 사안이 많고 협력 기회도 적지 않았지만 좋은 결과를 가져온 것은 드문게 사실”이라고 지적하고 “하지만 양측이 서로 보완해줄 수 있는 것을 갖고 있는 만큼 올바른 IT문화 창달을 위해 지혜롭게 협력해나가야 한다”고 말했다.

 <이호준기자 newlevel@etnews.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