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근의 정보통신 문화산책>(72)마르코니의 서울방문

‘인류문명의 대 은인(恩人), 무선의 자부(慈父) ‘말코니’’

 ‘21세 약관에 경천(驚天)적 대 발견, 내 25일 조조입경(早朝入京).’

 1933년 11월 24일(금)자 조선일보 2면을 장식한 큰 제목으로, 무선통신의 창시자 마르코니가 부산을 거쳐 서울을 방문한다는 기사의 타이틀이다. 그 아래 기사에는 ‘역사가 있은 이후 최고의 문명시대인 20세기 문명의 최첨단, 최고 원동력이 되는 무선통신의 발명자 ‘말코니’가 일본에 왔다가 25일 새벽 6시 45분에 서울에 도착한다’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당시 석간이었던 조선일보에서는 이탈리아의 발명가로 무선전신 방식의 통신장치를 처음으로 실용화했고, 회사를 설립해 사업에도 성공한 마르코니(Guglielmo Marconi 1874∼1937)의 서울 방문 사실을 방문 전날인 24일과 서울을 출발한 26일 두차례에 걸쳐 크게 다루고 있다.

 마르코니가 서울에 도착하기 전날인 11월 24일자 기사에는 ‘말코니 후작과 그가 발명한 무선전신 기계’라고 설명이 붙은 사진과 함께 6단에 걸쳐 마르코니에 대한 상세한 내용의 기사가 게재되었다. 마르코니의 출생과 교육과정, 전파에 대한 실험, 그리고 21세의 나이에 무선전신 방식의 통신장치를 개발한 내용을 구체적으로 설명하고, 이어 대서양을 건너서까지 무선통신이 이뤄지는 과정도 자세하게 설명하고 있다. 또한 기사에서는 무선전신이 실제로 그 위력을 맨 처음 발휘한 ‘타이타닉호’에 대한 내용도 자세히 소개하고 있다.

 ‘1912년 4월 대서양 한복판에서 빙산에 충돌한 유명한 기선 ‘타이타닉호’가 침몰하면서도 ‘말코니’식 무선으로 ‘SGS(SOS의 오기)’ 구조신호를 자꾸 발신한 결과 승객과 승조원의 일부를 구조한 일이 있다 하니, 세상에는 이보다 신기한 일이 없을 것이다.’

 11월 26일자 조선일보 2면에는 마르코니가 실제로 서울에 도착한 후 기자회견을 한 내용을 ‘무선전신 다음엔 ‘텔레비쥰’ 시대!’ ‘입경한 ‘말코니’ 본지 기자와의 문답’ ‘정치에 관하야는 함구’라는 내용을 큰 제목으로 뽑고 있다.

 마르코니는 기자회견에서 ‘조선문화가 진보하였으며, 산천은 이탈리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말한 다음,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태평양의 푸른 물을 보고 갑자기 동방의 문물을 구경하고 싶어서 오게 되었다’고 말했다. 또한, ‘앞으로 과학의 발달은 ‘텔레비쥰’ 시대를 불러올 것이다’라는 미래예측도 했다. 그러나 정치적인 발언은 일체 삼갔다고 기사는 전하고 있다.

 당시 마르코니에 대한 관심은 대단한 것으로, 신문에서는 학생들과 관련자들이 그를 구경하기 위해 마중했다는 기록과 함께 마르코니의 일정을 소개했는데, 조선총독부·창덕궁·비원을 방문했고, 저녁에는 총독의 환영만찬에 참여한 후 11월 26일 오전 7시 특급열차로 다롄과 상하이를 거쳐 자기나라로 돌아가게 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무선통신을 통한 공간의 개념을 무너뜨린 인류문명의 대 은인 마르코니.

 그가 발명한 무선통신기술은 20세기 정보통신혁명 시대를 연 가장 획기적인 발명의 하나로, 공간적 제한을 없앴고 움직이는 통신을 가능하게 했다.

 전적인 기술자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사람들과 기술을 최대한 활용, 위대한 업적을 이룬 마르코니는 1874년 4월 이탈리아의 볼로냐 지방 폰테키오에서 부유한 집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 주세페는 볼로냐 귀족 출신의 사업가였고, 어머니 안나 제임슨은 아일랜드 출신의 영국인이었다. 상냥하고 예술지향적이던 이 영국 여성은 음악을 공부하러 이탈리아에 왔다가 1864년 주세페와 결혼했고, 10년 뒤 마르코니를 낳았다.

 마르코니는 어려서 특히 과학을 열심히 했다거나 공부에 특별한 재능을 보였다거나 하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바다를 좋아하고 요트를 즐겼다. 리보르노공과대학에 다니던 1894년에 마르코니는 알프스의 산장에서 ‘전기의 세계’라는 잡지를 읽다가 1888년에 발표되었던 헤르츠의 전파에 대한 기사를 읽고 자극을 받았다. 마르코니는 그 요술처럼 신기한 전파를 더욱 더 연구해 생활에 이용해 보겠다는 결심을 하고 연구를 시작했다.

 모스의 전신기가 발명된 후 60년이 지났는데도 필요한 곳까지 전선을 설치해야 했고, 먼 거리일 경우에는 그 공사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따라서 전선이 필요없이 신호를 주고받을 수 있는 무선의 통신방법을 개발한다면 매우 편리하겠다는 생각으로 마르코니는 아버지의 친구이기도 하던 당시의 유명한 물리학자 리기 교수를 볼로냐대학으로 찾아갔다. 여기서 마르코니는 맥스웰이 예언한 빛과 유사한 성질을 지닌 전자기파의 존재에 대한 헤르츠의 증명을 바탕으로 좀 더 깊은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고, 20세 되던 해에 부친의 광대한 토지를 사용한 공간을 확보하여 전파실험에 착수할 수 있었다.

 여기서, 마르코니는 새로운 이론이나 기계, 기구를 발명한 것은 아니었다. 다만 많은 사람들이 발명한 것들을 종합해 실제 사용할 수 있는 무선통신설비로 정리했던 것이다.

 1894년 12월 드디어 마르코니는 대학생으로서 첫 전파실험에 성공했다. 1895년에는 거의 2㎞의 거리까지 확장했다. 이는 상용화할 수 있는 거리에서 무선전신이 가능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며, 이를 무선통신의 성공시기로 잡고 있다. 1897년 여름, 마르코니는 런던에 그의 이종사촌을 앞세워 마르코니무선전신회사를 설립했다. 그리고 1년 뒤에는 처음으로 휴양지 화이트섬과 영국 본토 사이 33㎞거리에서 상업무선통신을 개통했다. 1899년 3월에는 도버해협을 무선통신으로 연결했고, 1901년 말에는 대서양을 무선통신으로 연결했다.

 당연히 마르코니에게는 온갖 영광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909년에는 그에게 노벨물리학상이 주어졌다. 정식으로 과학교육을 받은 적이 없는 마르코니에게 노벨물리학상이 수여되었을 때 이미 세계적으로 300척의 상업 선박과 거의 전부의 해군 선박에 무선전신장치가 설치되어 있었다.

 또한 1912년에는 앞서 거론했던 ‘타이타닉호’의 침몰당시 ‘SOS’ ‘CQD’ 신호를 통해 700명 이상의 인명을 구하게 되어 마르코니와 그의 회사는 엄청난 도약을 이룩했다. 이때 해저케이블을 통한 통신과의 경쟁에서 마르코니의 회사는 완벽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1914년 이탈리아 정부는 그에게 원로원 의원 자격을 부여했고, 제1차대전이 끝났을 때 이탈리아 정부는 그를 파리 평화회담의 이탈리아측 전권대표로 임명했다. 당시 그의 명성이 세계적이었음을 일깨워주는 영예였다. 특히 미국에서조차 1930년 10월 2일을 ‘마르코니의 날’로 선포하여 그의 업적을 기렸다.

 마르코니의 서울 방문에 대한 기사가 실린 1933년 11월 24일자 조선일보에는 서울에 함께 도착한 마르코니 부인에 대한 내용도 있었는데, 그 내용이 매우 흥미롭다. 한번 연구를 시작하면 침식을 잊고 거기에만 열중하는 성격인 마르코니가 연구에만 열중하면서 부인에게 소홀히 하자 젊은 회포를 풀지 못한 부인이 실행(失行)하게 되었고, 이 사실이 세간의 관심거리가 되어 마르코니는 그 부인과 인연을 끊고 1927년에 다른 처녀와 다시 결혼하여 이번에 함께 방문했다는 내용이다.

 당시에도 발명과 연구는 물론, 삶 자체도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작가/한국통신문화재단(KT과학관장)